<소설 '1950년 6월'> 1.호밀 밭에서 생긴 일(4)
<소설 '1950년 6월'> 1.호밀 밭에서 생긴 일(4)
  • 대구신문
  • 승인 2009.06.1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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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농촌에 살면서도 바늘 하나 꽂을만한 논밭도 없었고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하고 한학과 신학문을 겸한 문장가에 청렴한 선비로 명망이 높았으나 친일로 입신양명을 하지도, 독립운동으로 해방정국에 참여하지도 못한 나약한 지식인으로 생활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일제식민지 시절 동경제대를 나온 예우로 고향인와촌에서 잠시 면장을 한데다 해방 후에는 아들 둘이 경찰에 투신한 관계로 팔공산 빨치산(공산당 유격대)들의 응징표적이 되어 안전한 평야지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 금호에 겨우 함석집 한 칸을 마련해 이사를 온후 궁핍한 생활이 이어져 왔다.

이곳은 우리 고향과는 달리 전깃불이 들어오고 대구선 철도가 있어 기차가 다니며 포장된 국도로 자동차도다니고 있어 엄마는 대구에서 비단을 받아와 장사를 시작했으며 누나와 나는 대도시로 이사를 온 것처럼 들떠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곳에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더욱이 평생을 의지해 왔던 스승이자 집안의큰 어른인 윤치호 선생이 친일파라는 죄책감 때문에 자결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미 군정청 학무국장이 제의한 중학교교장자리도 마다하고 모든 바깥활동을 접고 출입을 삼갔으며 기껏해야 동네와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이나 지어주고가끔 관혼상제(관례, 혼례, 상례, 제례)를주관하거나 글을 지어주고 술대접이나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이런 아버지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열 살 때 세 살 위인아버지께 시집을 와 호강보다는 고생을더 많이 하고 아버지와 함께 한날 보다 떨어져 있었던 날이 더 많았으나 어린 나이에 손이 귀한 집안으로 와 자식을 많이 낳았다고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아버지가 공부를 많이 하고 객지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신여성과 염문을 뿌리거나 첩 살림을 한적이 없었으며 아내로서의 대접을 받은 것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 집안이나 동네 사람들로부터 면장댁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간이학교(4년제 초등학교)를 나와 가사를 돕고있는 막내누나를 데리고 오일장을 다니며비단이나 모시와 같은 옷감장사를 하거나집에서 곡식과 물물교환을 하기도 하고혼수나 예복과 같이 귀하고 어려운 삯바느질을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 오면서도아버지와 나의 의복만은 그 누구 못지않게 번듯이 잘 챙겨 주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혹시 엄마가 마음 아파할까 봐, “잘 차리긴뭐를 잘 차려, 그 집이나 우리 집이나 다똑같더라, 그냥 개 보름 세듯이(나물뿐인정월 대보름 음식) 밥만 한 그릇 묵고 왔다. 그라고 영순이 엄마가 안부 전하면서모시로 조선옷(한복) 두벌 할 것 있고 양단옷감도 구경 하자면서 다음장날 좀 보자 카더라.” 하고는 돈 삼천 원과 하모니카를 내 놓았다.

“이 돈은 웬 거고, 또 이거는 뭐꼬?”“돈은 영순이 아부지가 공부 잘 하라 카면서 주는 거고 하모니카는 영순이가 준 선물이다.” 보따리를 풀어 헤치던 엄마가,“아이고 왠 떡을 이렇게 많이 보냈노, 떡도 한가지뿐만 아이네, 그라고 신문지에싼 거 이거는 또 뭐꼬, 아이고 소고기네,서 근은 좋게 돼 보인다, 안 그래도 여름에는 일감이 없는데 옷을 두벌씩이나 할라 카니 이렇게 고마불 데가 어딧노, 한산세모시하고 최고급 모본단(중국산 비단)을 준비해놔야겠네, 그라고 소고기는 오늘저녁에 당장 국을 끓이고 남는 거는 안상하도록 모두 장조림을 해놔라.” 하면서`아이고 고마버라’를 연발하자 누나가,“너무 고마버 할꺼 없다, 자기들 대로는다 속셈이 있어서 그란다.” “야가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노, 속셈이 있을 끼 뭐가있는데, 그 집에서는 처음부터 즈그 딸 공부 잘 하라고 학교하고 사바사바(뒷거래)해가 우리 호진이와 짝을 만들어 준거 아이가, 부모 욕심이야 누구나 다 마찬가지지.” “엄마도 참, 생각을 좀 해봐라, 오늘일만 해도 그렇지 돈에, 떡에, 고기에, 바느질 감까지 이게 예삿일 이가, 무슨 새색시 이바지 음식 해온 것 같구마는, 그 집에는 전신만신 독 씻고 단지 씻고 딸 하나뿐인데 나중에 우리 호진이를 중학교 공부시켜 준다카고 델고가서 더불(데릴)사위 삼을라 카는거 아이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느마는, 중학교에 들어가마 까딱하마(잠시 잘못하면) 아들 빼앗긴다.”“뭐라꼬, 아이고 니가 그카고 보이 그런거 같기도 하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소리 하지 마라 케라, 겉보리 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 카는데 우리가 암만 없이 살아도 그래는 못한다, 국민학교밖에 안 나와도 공부만 잘하면 고등고시봐가 판검사, 군수 다 할 수 있다 카는데꿀릴 기 뭐가 있노, 우리 호진이는 시험만쳤다 카면 백 점이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데, 내사 무슨 짓을 하던지 간에대학까지 보낼끼다, 그라고 대구 느그 큰오빠가 지금은 주임(지서장)급이지만 호진이 대학 갈 때까지 경찰서장 못하겠나,그라마 잊었뿐다, 서장이라 카는 기 지 막내 동생 대학 하나 못 시키겠나?” 이와 같이 엄마의 서슬이 퍼래 지는 것을보고 나는 겁이 덜컥 났다.

평소에도 동네 사람들이 우리아버지를 두고는 법 없이도 살 수있는 사람, 부처님 손잡고 이승에놀러 나왔다가 손 놓친 사람이라고 하며 택호 마저 금산어른이 아닌 금산양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엄마는 창원 황씨로 몽고장수의 후예답게 성격이활달했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
나 항상 당당했으며 정규교육을 받은 바는 없으나 신식공부를 한 아버지에 비해 기울지 않으려고 자력으로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쳤고 비단장사의 거래장부를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산법도알고 있었으며 사리의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말도 청산유수 같아 장터에서는 아버지의 성을 따서 윤변호사로 통했다.

그리고 우리 집의 가보 일호인 싱거미싱(재봉틀)으로 웬만한 옷 수선은 다 공짜로 해주고 집안이나 동네의 딸네들이시집을 가면 언문(한글)으로 된 계녀가,규중행실가와 같은 내방가사나 안사돈간의 안부 편지인 사돈지를 버선 한 짝도 받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도맡아 써 주었기때문에 엄마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누나와 나도 아버지보다는 엄마를 더 어려워했다.

엄마의 이러한 선행은 모두가 험한 세상에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좌익(공사주의자)의 테러로부터 아버지를 보호하고 늦게 얻은 막내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적선이었다.

이처럼 깊은 해자(성을 둘러싼 물)가되어 나를 감싸 안고 있는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오늘 영순이와 신랑각시하기로 하고 손가락을 걸었던 것은 아예입도 벙긋 하지 않기로 했으며 호밀 밭에서 있었던 일을 혹시 정길이가 봤을 까봐새로운 걱정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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