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950년 6월'> 4.검둥이 아저씨와 미국 유학(1)
<소설 '1950년 6월'> 4.검둥이 아저씨와 미국 유학(1)
  • 대구신문
  • 승인 2009.07.2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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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에 자고 일어나 학교를 바라보니 밤사이에 국군부대는 떠나고 유엔군(미군)부대가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허술한 학교 담장밖에 철조망을 치는 공사를 하고 있었으며 바깥출입은 하지 않고 철조망 밖으로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과자를 던져주며 괴상한 소리를 지르거나 낄낄대며 웃기도 하고 엠원소총을 겨누며 총을 쏘는시늉을 하기도 했다.

전쟁 전에도 미군을 본적이 있었으나 이렇게 많이 한꺼번에 보기는 처음이며 우리들은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듯 흰둥이와 검둥이들을 신기한 눈으로바라보고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놈들이, “할로, 츄잉껌쵸콜랫 기브미.”하고외치면 미군들이 여기저기 과자봉지를 던져주었고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이것을 주우려고엎어지고 자빠지고 야단법석이 났다.

그러나 나는 그걸 줍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더니 이를 본 미군이내가 너무 어리고 작아서 줍지
못하는 줄 알고 저 멀리 과자를 한 움큼 던져 큰 아이들이 모두 그리로 달려간 사이 내 앞에 큼직한 봉지 하나를 던져 주었으나 나는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미군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을 벌려 보였으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두 손으로 갖다 바쳐도 받아 먹을 똥 말똥한데 내가 비록 제 놈보다 나이는 어릴지라도양반가문의 선비한테 음식을 던져주다니…몸집은 코끼리 만한 것들이 영 쉬근(소견)머리도 없고 덩치 값도 못하는 상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알고 어디서 왔는지 학교 앞 길갓집에는 세탁소, 빵집, 양색씨 집 등이 즐비하게들어섰고 외지의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북새판을 이루었으며 한적했던 시골동네가 제법도시처럼 흥청거리기 시작했다.

우리집도 바로 학교 정문 앞인데다 엄마가비단가게 겸 바느질을 하는 널찍한 대청마루가 있어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 집세를 후하게주겠다고 빌려 달라고 했으나 아버지가 번번이 이를 거절하였다.

미군이 주둔한지 삼일 째 되던 날 아침 군복을 입긴 했으나 계급장도 없고 모자도 쓰지않은 채 나이가 마흔도 넘어 보이는 흑인 한사람이,“주인장 계십니까?” 하고 우리말로 인사를 하며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이리 올라 오시지요,저가 주인입니다.” 하고 일어서니,“아 그렇습니까, 인사 드리겠습니다, 저는 `오’가라고 합니다.” 하고 큰절을 하자 아버지도 황급히,“저는 `윤’가 올시다.” 하며 맞절을 했다.

“저는 군인은 아니지만 그저께 미군들과 함께 여기에 왔습니다, 혹시 미군이 들어와서불편하거나 생업에 지장이 되는 일은 없습니까?” “전쟁이 나서 우리를 도우러 왔는데 불편해도 도리가 없지요, 추수는 아직 멀었고아이들이 개학은 했으나 공부할 장소가 없어그게 난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말을 그리도 잘 하십니까?” “저는 일본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조선말과 역사를 배웠으나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잘하십니다, 그러면 일본말도 잘 하시겠군요?”“예, 조선말 보다는 일본말을 더 잘합니다.”“저도 일본에서 대학을다녔으니 일본말로 대화를 해도 되겠군요?”“아, 일본에서 대학을나왔군요, 그러면 무엇을 전공하였습니까?” “사학과에서 동양사를전공하여 젊은 시절 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동양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저를미스터`오’ 라고 불러주세요.” “그런데 미국에도 오씨라는 성이 있습니까?” “하하하, 그런거는 아니고 제 원래의 성은`오바마’ 인데 한자에 `바’자가 없어 오보마(烏寶馬)라고 조선식 이름을 한번 지어 보았습니다, 검은 보석과같이 귀한 말이라는 뜻이지요.”“정말 대단하십니다.”그 후로 미스터 오는 자주 술과 깡통(통조림) 등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와 우리말과 일본말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고담준론을 나누었고 우리 식구들은 그를`오선생’이라고 불렀으나 나는 본인이 없을 때는 그냥`검둥이 아저씨’라고 했다.

우리는 그의 신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비록 얼굴은 검어도 일반 미군들과는 다른품위를 느낄 수 있었으며 빈손으로 올 때는누나가 막걸리를 받아 오고 국수나 삶은 감자를 대접하기도 했으
며 군복을 깨끗이 빨아 정성껏 다림질을 해 주기도 했다.

이럴 때면 그는 미국 돈을 내 놓기도 했으나엄마가 극구 사양하면 다음에는 더 많은 먹거리와 비누 같은 생활용품 등을 가져 왔고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하면 미국노래, 일본노래에다 아리랑까지
부르기도 했으며 이러는 가운데 나와도 점차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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