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950년 6월'> 4.검둥이 아저씨와 미국 유학(4)
<소설 '1950년 6월'> 4.검둥이 아저씨와 미국 유학(4)
  • 대구신문
  • 승인 2009.07.3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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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게 합시다, 내일 당장 떠나는 것도아니고 전쟁이 끝나야 하니까, 그러나 이건호진이나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므로 이십 년 삼십 년 앞을 내다보고 결정 해야지 섣불리 결론을 내리면 안됩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면 어떤 분야의 공부를 시킬 작정입니까?” “전문기관에서 적성검사를 받아 본 후 전공분야를 정해야 하겠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고등학생쯤 되면 자연스럽게 적성이나 특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대한민국이 신생독립국가 이니까 세계만방에 코리아를 알리고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치외교 분야가좋을 것 같고 가난한 후진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무역분야가 유망할 것 같습니다.”“의사나 교수가 되면 제 일신이야 편하겠지만 오선생이나 저나 보람을느낄 수 있도록 자기도취와 공명심에 안주하는 사람보다는 민족이나인류와 소통하고헌신할 수 있는 인물로 키워 주십시오.” “저도 그 점에서는 동감입니다, 앞으로몇 십 년 후에 이 집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나 전세계의 대통령 격인 유엔사무총장이나올지 누가 압니까, 저는 호진이한테 영어를가르치면서 그런 기대와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역시 오선생은 역사의 흐름과 미래를 제대로 내다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군요” 하며 무척 고무된 기분이었다.

검둥이 아저씨가 돌아가자 우리 집은 발칵뒤집혔다.

엄마가 고래고함을 지르며, “세상에 저런날 도적놈이 어딧노, 지놈이 우리하고 피가섞였나 살이 섞였나, 지가 뭔데 남의 금쪽같은 자식을 양자로 돌라카노, 껌둥이한테 양자로 줄 바에야 차라리 과수원 집에 더불사위로주는 기 훨씬 더 낫겠다, 당신은 그 소리 듣고도 와 그냥 있었는교, 그 껌둥이 놈 귀싸대기를 한대 올렸뿌지.” 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도 모르고 자식 귀한 줄만 안다고 엄마를 나무라며, “남자에게는 기회가 항상 오는 게 아니고 한번 왔을 때똑바로 잡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선천적으로 이재에밝지 않으면 나처럼 평생 사람 구실도 못하고무위도식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지겨운 가난을 대물림 할라 카거든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이나 끼고 살아라.” 하며 크게 화를 냈다.

그러나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호진아 니가 미국 갔다 오면 내 나이가 칠십인데 그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판에 미국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미국이고, 그라고 지놈이 일등병 보다 도 더 못한 군속(민간 군무원)인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 우리호진이 대학공부를 시킨다 말이고, 말로가 떡을하마 중국 놈, 미국 놈 다 묵이고도 남겠다, 그라고 뭐 이 집에서 대통령이 나와, 지놈이 점쟁이가 풍수쟁이가, 말하는 짓거리가 영락없는 협잡(사기)꾼이구마는, 두고 보소 미국유학 수속하는데 필요하다고 틀림없이 돈 내노라 할낍니더.” 하면서 계속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검둥이 아저씨와 영화, 신문 등의 영향으로 미국을 무척 동경하고 있었지만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끄집어냈다.

“엄마야 울지 마라, 나는 엄마 아부지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걱정 하지 마라,미국에 가서 공부해도 방학 때는 비행기 타고 집에 올수 있고 대구나 서울 가서 공부해도방학 안 하면 집에못 오는 거는 다 마찬가지 아이가, 그라고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 한국에 오는 시간이나 서울에서 기차 타고 집에 오는 시간이나 다 똑같이 걸린다.” 라고 하니 그제서야 눈물을 거두었다.

그날 이후 나는`가난’이란 두 글자 외에`아버지의 한’이라는 새로운 슬픔 하나를 더 가슴 깊숙이 간직하게 되었으며 아버지가 내게의사를 물었을 때도 태도를 분명히 했다.

“아부지요, 지는 이미 결심이 서 있습니더,지금 국민학교 월사금도 제때 못 내는 형편인데 앞으로 중학교에 우예 가겠습니껴, 검둥이아저씨 따라가 미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돌아와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안 되겠습니껴,다른 거는 몰라도 공부라 카마 미국 놈 보다더 잘할 자신이 있습니더, 지는 아부지 뜻에따르겠습니더.”아버지는 내 어깨를 잡고,“너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당부를했으며 나도 그 말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둥이 아저씨가 오랜만에 자장면을 먹으로 가자면서 내게 물었다.

“호진아, 너는 십 년이 넘도록 어머니 아버지 곁을 떠나 나와 같이 미국에 가서 공부할수 있겠느냐?”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가면 너는 법적으로 내 아들이 되는데 나를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겠니?”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결심을 했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내 자신과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또 하나의 이유인`아버지의 한을풀어드리기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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