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950년 6월'> 5.연적에게 포로가 되다(1)
<소설 '1950년 6월'> 5.연적에게 포로가 되다(1)
  • 대구신문
  • 승인 2009.08.06 18:2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사랑채의 내공부방 앞에 군화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엄마, 우리 집에 왠 군인들이고?” “반찬값이나 할라고 최중위한테 사랑채를 세놨다.” 하면서 보기 드문 찹쌀모찌(찹쌀떡) 몇개를 내 놓았다.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사랑채 옆방 문을벌컥 열었다.

얼씨구, 짜식들이 명색이 장교라고 제법 푸짐한 술판을 벌려놓고 희희낙락 하던 중 최중위가 나를 보더니,“네가 호진이구나, 급장에다 영어도 잘 한다면서, 이리 와서 과자도 먹고 탕수육도 먹어.” 하는 것이었다.

꼬라지를 보니 개 핥은 죽 사발처럼 인물은훤한 게 과히 밉상은 아니었다.

“여기는 내방인데 와 내 허락도 없이 들어왔는교?” “어머니한테 허락을받았지, 내가호진이 영어공부도 가르쳐 주고 대구에 가서극장구경(영화구경)도 시켜줄테니 잘 사귀어보자고.” “필요 없구마, 군인이 전쟁이나 하지공부를 우예 갈치는교?” “잘 가르쳐 줄 수 있어, 나도 군인이 되기 전에는 중학교 영어 선생이었어.” 중학교 영어 선생이었다는 말에나는 그만 기가 죽었고 또 엄마가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그날은 그쯤 해 두었다.

그 이후로 나는 최중위로부터 엄청난 물량공세를 받았다.

책가방에 파카만년필은 물론 그 귀한 영어사전 까지 받았고 가끔 군용차를 타고 대구에같이 나가 서부극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사먹었으며 틈틈이 삼위일체라는 책을 놓고영문법을 배우기도 하고 우리 누나도 화장품등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가 먼 길을 돌아 학교 후문을 통해 뒷마당에 새로 지은 가교사에 다니도록 되어 있었으나 나는 최중위의 배려로 보초병의 거수경례까지 받아가며정문으로 출입을 했다.

이러는 사이 나는 완전히 그의 포로가 되어버렸고 과년한 딸을 가진 엄마도 최중위를 마음에 두게 되었으며 최중위를 대하는 누나의태도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데 최중위가 난데없이 우리선생님에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기도 하고 선생님의 하숙집과 본가가 어딘지 근처 까지만 같이 가보자고 하여 이상히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최중위가 누런 편지봉투를 주면서 우리선생님께 전해 달라고 했다.

“이게 뭔데요?” “아 이거, 옛날에 너희 선생님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전쟁 통에 답장을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하는 거야.” “답장을 할라카마 우체국에 가서 부치면 되는데와 내께 주는교?” “지금은 전쟁 중이라서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칠 수가 없단다.” (누가군인장교 아니랄 까봐 말끝마다 전쟁타령이고…) 나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 동안받은 선물도 많고 하여 이번 한번만 심부름을해주기로 했다,(그런데 국군부대가 들어 온지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최중위가 우리선생님을 어떻게 알까, 옛날에 우리선생님이 보낸편지는 뭐고 답장은 또 뭐야…)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내 머릿속에서 우리선생님과 최중위와의 관계가 미처 정리가 되기도 전에어느 날 방과후선생님이 나를불렀다.

“호진아 영어공부 잘하고있니, 미스터오는 아주 훌륭하고 믿을수 있는 사람이니 꼭 미국에 따라가야 한다, 이번 기회가 너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행운이야, 선생님도 힘 자라는데 까지 도와줄게,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 해야 한다.” “예, 고맙습니더, 선생님 은혜 잊지 않겠습니더.” “오냐, 그리고 최중위도 참 좋은 사람이란다, 너희 집에 있는동안 영어를 열심히 배워라, 그리고 이 편지를 갖다 주고 다시는 편지 심부름을 하지 말고 소문도 내지 마라.” 하고 당부를 했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가고있는 것 같았다.

나는 며칠을 혼자서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엄마와 누나 앞에서 편지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 얼굴이 흙빛이 되면서,“최중위가 느그 선생님을 사모해서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딱지를 맞았는갑다.” 라고 했다.

“누부야 사모는 뭐고 또 딱지는 뭔데?”“그런기 있다, 니는 몰라도 된다.”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우리누나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내 문제였다.

(아니 이자슥이 감히 내가 사모하고 있는우리선생님을 넘어다 봐, 어림도 없어, 당장우리 집에서 쫓아 내야지.)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최중위에게 우리선생님께 연애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는 이후 일체 상대를 하지 않고 학교에도 다시 후문으로 다니면서 최중위를 쫓아낼 궁리만 하고 있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