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마을이야기] 느릿느릿…그곳에 가면 여유가 찾아든다
[청송 마을이야기] 느릿느릿…그곳에 가면 여유가 찾아든다
  • 김상만
  • 승인 2015.08.12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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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경상북도 마을이야기-청송 덕천마을

역사 품은 마을

고려말 충신 심원부의 후손이 정착

송소고택, 조선시대 지은 99칸 대저택

마을 왼쪽 독립운동 유적 ‘소류정’도

느림의 미학

전통문화 계승하는 ‘국제 슬로시티’

마을 뒤 숲길 따라 걷는 큰내이야기길

맑은 공기 마시며 6.2㎞둘레길서 산책
/news/photo/first/201508/img_172561_1.jpg"덕천마을
느림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의 모습이 아름다운 산세와 어우러져 풍경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靑松. 경북 청송은 한자로 푸를 ‘청’, 소나무 ‘송’자를 쓴다. 언뜻 산간 오지에 푸른 소나무가 많은 고장으로 연상된다. 대개의 지명은 그 지역 산천의 형세나 전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청송이란 지명은 조선조 세조때 송생·안덕현을 편입 합병해 청송도호부로 승격될 당시부터 사용됐다. 청송군은 ‘청송’을 동쪽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 세계,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에 가장 적합한 이상의 세계로 재해석하고 있다.

청송 내에서도 이번에 찾아간 ‘덕천마을’은 신선이 노닐다 간 듯 산세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이다. 송소고택에서의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면서 천연염색, 청사초롱행렬체험, 부자흙 훔치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덕천큰내이야기길(숲길 2.5㎞, 마을길 3.7㎞)을 걸으며 도시에서 지친 마음을 치유할 수도 있다. 그래서 덕천마을의 하루는 짧다.

◆ 역사를 고이 품은 그때 그 이야기 속으로

군청 소재지인 청송읍에서 약 3㎞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덕천마을에 들어서면 널찍한 논과 밭 뒤로 단아한 한옥들이 자태를 뽐낸다. 앞으로는 용정천이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다.

덕천마을은 관향(貫鄕)을 청송으로 하는 청송 심씨들의 집성촌(集成村)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청송 심씨가 이곳에 정착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말(1391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정몽주, 길재 등과 함께 고려의 망국한(亡國恨)을 품고 두문동(杜門洞·고려말 충신72현이 조선조 개국에 반대해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감했던 장소로 지금 개성 부근의 깊은 산골마을)에 들어간 악은공(岳隱公) 심원부(沈元符)의 일화에서 일부 찾을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심원부는 당시 아들 삼형제를 불러놓고 “나라도 망하고, 임금도 잃었으니 너희들은 조상이 묻혀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시조선산(始祖先山)을 지키며 살아가라”는 유훈(遺訓)을 남겼다.

따라서 1400년대를 전후해 그의 후손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고향땅인 이곳 덕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오늘날까지 자자손손 선훈을 지키며 살아 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리고 덕천마을은 옛날부터 왼쪽에 있다하여 상덕천(上德川·지금의 신흥리) 아래쪽에 있다하여 하덕천(下德川·지금의 덕천리)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또 조선 택리지(擇里志)에는 “상촌 왈 장촌, 하촌 왈 심촌(上村曰 蔣村·下村曰 沈村)”이라고 하였는데 덕천마을 중 위쪽에는 조선 숙종때 의성에서 이곳에 입향(入鄕)한 것으로 전해오는 아산장씨(牙山蔣氏)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청송을 관향으로 하는 청송심씨(靑松沈氏)가 세거를 이루고 있다. 심부자의 재력은 9대 2만석으로, 해방 전 일제시대 때도 2만석을 했다고 전해진다.

◆ 처마 끝 걸린 달을 바라보며 스르르 잠들다

/news/photo/first/201508/img_172561_1.jpg"송소고택/news/photo/first/201508/img_172561_1.jpg"
낮은 돌담 너머로 송소고택 내부의 모습이 엿보인다. 이 고택은 99칸의 대저택으로 1880년경에 지어졌으며, 국가중요민속자료 250호로 지정돼 있다. 청송을 찾은 관광객들이 천연염색을 통해 자연의 색을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다.
덕천마을에는 삼부자댁으로 알려진 송소고택을 비롯해 수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즈넉한 고택에서 옛 선현들의 숨결을 체험하고 전통을 느낄 수 있다. 고택들은 대부분 ‘ㅁ’자 형태로 지어져 있다. 작은 규모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부속채로 둘러싸인 사각형 형태다.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리던 심처대의 7세손 송소 심호택이 호박 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마을에 이거 하면서 지은 99칸의 대저택으로 1880년경에 지어졌다. 국가 중요 민속자료 250호로 지정돼 있다.

대문은 솟을 대문에 홍살을 설치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크고 화려한 큰 사랑채는 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우측으로 작은 사랑이 있고 그 뒤로 안채가 있다. 건물에 독립된 마당을 따로 둔 조선시대 상류층의 전형적인 주거 형태다.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 교창을 달았다. 별당은 2채인데, 하나는 대문채이고 또 하나는 별당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대문 안쪽에는 유교문화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헛담이 있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집안 여인들이 사랑채의 남성과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해 헛담을 쌓았다. 자연스레 여자들은 오른쪽으로 돌아 안채로 들어가게 되고 남자들은 왼쪽으로 들어가 사랑채로 향하게 되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랑채와 안채 사이 담장에 뚫린 구멍이 흥미롭다. 사랑채에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엿보기 위한 것으로 바로 구멍담이란다. 구멍의 수는 사랑채에서 보면 6개지만 안채에서 보면 3개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채 구멍 1개에 사랑채 구멍 2개를 45도 각도로 연결해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이지만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 한옥에는 선조의 지혜와 배려, 여유가 곳곳에 묻어 있다. 툇마루 밑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하얀 고무신과 청색 고무신, 그 위로 매달려 있는 짚신 두 짝이 한옥의 정취를 더한다. 옛 선조들은 산이나 봉우리가 보이도록 사랑채와 마루 등을 앉혀 자연을 집 안으로 품었다고 한다. 마루에 올라 작은 방으로 들어가 앉으니 콩기름을 먹인 장판지가 피로를 누그러뜨린다. 여름밤 방문을 열어 제치고 처마 끝에 걸린 달을 바라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송소고택의 바로 옆에는 송정고택이라는 또 다른 기와집이 남아 있다. 심부자집 큰아들이 살던 곳으로 송소고택과는 또 다른, 좀 더 아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송정고택 마당에서 이어진 뒷산에 올라 덕천마을을 내려다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 자연이 내린 웅장한 경치와 느림의 미학까지

/news/photo/first/201508/img_172561_1.jpg"천연염색
낮은 돌담 너머로 송소고택 내부의 모습이 엿보인다. 이 고택은 99칸의 대저택으로 1880년경에 지어졌으며, 국가중요민속자료 250호로 지정돼 있다. 청송을 찾은 관광객들이 천연염색을 통해 자연의 색을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다.
덕천마을은 자랑거리가 참 많다. 지난 2011년 국제 ‘슬로시티(Slow City)’ 마을로 선정됐다. 그렇게 청송한지장, 천연염색, 청송 백자전수장 등 전통 문화를 천천히 끈질기게 계승하면서 느린 삶을 실천하는 곳이다. 같은 해 1000대 1이라는 바늘구멍을 뚫은 ‘한국 관광의 별’에도 뽑혔다.

덕천마을의 숨은 명소인 큰내이야기길로 들어가보자. 덕천마을과 마을 뒤의 숲을 따라 약 6.2㎞의 둘레길이 조성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할 수 있다. 여름의 웅장한 자연을 벗삼아 그 아름다움에 빠져 걸어보면 보드라운 흙내음이 흠뻑 전해진다. 산들 바람이 이마에 송송 맺힌 땀방울을 식힐 때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한다.

마을의 왼쪽 끝으로 가면 항일독립운동 유적인 소류정(小流亭)을 만날 수 있다. 소류정은 구한말 청송 의병대장을 지낸 소류(少流) 심성지(沈誠之·1831~1904) 선생이 경전을 연구하며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허나 그 중요성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2012년에야 문화재 497호로 등록됐다.

소류정이 있는 곳과는 반대로 가면 초전댁(草田宅)과 창실고택, 요동재사(堯洞齋舍)가 자리 잡고 있다. 초전댁은 조선 순조 때 통정대부명지중추부사를 지낸 청송심씨 석촌공파(石村公派) 17세조 덕활(德活)이 요절한 아우 덕종(德宗)의 양자로 입적한 친아들 헌문(憲文)의 네 번째 돌을 기념해 1806년(순조 6) 무렵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21세조인 선해(宣海)가 1900년에 보수해 대대로 살고 있다. 건물의 남쪽과 동쪽으로는 토담이 있고 담장을 따라 정원과 텃밭을 마련해 놓았으며 건물 오른쪽에는 예로부터 사용해온 오래된 우물이 남아 있다.

창실고택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3월에 지어져 100여년이 흘렀다. 심호택의 동생이 결혼할 때 분가를 위해 지어준 집이다. 부속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요동재는 청송심씨 12세 손인 심응겸(沈應謙)이 학문을 연구하면서 쉬던 곳이다. 지난 1890년대 보수 공사를 한 뒤 2003년 유교문화권사업으로 해체 보수공사가 이루어져 새로이 단장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구조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다. 그래서 덕천마을 여행은 잠깐 찾아와서 한두 시간 쓱 훑고 지나가서는 안 되는 ‘명품 여행지’이다.

청송=윤성균기자 ys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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