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1917~2009), 지역 추상미술 선구자의 삶과 예술 세계 재조명
[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1917~2009), 지역 추상미술 선구자의 삶과 예술 세계 재조명
  • 황인옥
  • 승인 2018.04.12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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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 1세대 작가…지난해 탄생 100주년
예술가·교육자로 살다간 삶 수회 걸쳐 탐구
자료제공 차규선
극재 정점식. 차규선 제공

작년(2017년)은 故극재 정점식 선생(이하 극재)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대구지역 몇몇 기관에서는 그를 기리는 행사를 마련했다. 학강미술관(6월)을 출발점으로 분도갤러리(7월)에 이어 극재미술관(10월)에서 진행한 전시와 학술행사가 그것이다. 필자는 학강미술관과 극재미술관 학술행사에 강연자로 참석하여 극재의 삶을 조망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본 연재는 당시 발제문에서 과제로 남겨두었던 논제를 보충한 것이다. 극재의 삶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를 좀 더 선명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재되었다. 극재의 예술세계를 독자들이 공유하길 바라는 하는 마음과 제자가 스승과의 약속을 실천한다는 남다른 의미가 추가된다. 하여 연재에 앞서 지역문화발전을 생각하여 귀한 지면을 내어준 대구신문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극재는 1940년대 초 일본 유학시절과 만주로 피난 간 시점을 제외하면 대구 지역을 떠나본 적이 없는 대구 토박이 화가였다. 대구 화단에서 초창기 현대미술의 발판마련과 그 맥을 이어온 꾸준함이 필적할만하다. 대구에서 활동한 작가가 극재만은 아니지만 작품에서 지방색이 짙을 것이라는 편견을 깬 몇 안 되는 작가이다. 시대의식을 뚜렷이 견지하고 팽팽한 긴장감과 사유로 지역작가의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보수성 짙은 대구지역화단에서는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는 외로운 길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태도가 예술가의 기본자세라 여기며 미술의 현대성을 개척하고 지켜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더하여 교육자로서의 품위와 인격을 두루 갖춘 교양인의 면모야말로 후학들의 본이 된다. 이 글을 시작하는 추가적인 이유이다.
 

2008년 극재 정점식의 자택에서
2008년 극재 정점식의 자택에서. 서영옥 제공

누군가의 이름 앞에 ‘故’자를 어김없이 붙여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고인이 된 스승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감격이다. 더하여 조심스럽다. 고백하건대 이 글은 1991년 스승인 극재를 첫 대면한 후 2009년 작고하기 전까지의 기억을 토대로 한다. 꾸준한 만남을 통해 유기적으로 얻게 된 정보가 내용의 밑바탕이다. 미리 밝히지만 필자는 극재를 신처럼 숭상하진 않는다. 성인(聖人)이나 영웅으로 모시고 싶지도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우리와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을 살아낸 불완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존경으로 기억되는 스승이고, 예술을 진지하게 고민한 예술가이자 인품을 두루 갖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인간을 정의한 예는 많다. 이를테면 불교와 도가의 인간관에서부터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인간관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 등, 셀 수는 있어도 그 의미는 층차가 있다. 필자의 기억에는 극재에게도 자신만의 인간관이 있었던 것 같다. 인간관은 그의 삶과 예술 활동에 구심점으로 작용했다. 어느 날 연구실에서 “너는 난사람 든 사람 된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될래?” 하던 질문이 선생의 인생관을 찾는데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지면을 채워가는 동안 화두와도 같았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더욱 확고해진다면 큰 기쁨이겠다.

극재는 1917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서 태어나 2009년 6월 10일 92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의 수필집에 기록된 회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극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모두 겪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두루 거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은 글로 뚜렷이 새겨두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수필집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철이 들면서 장년기에 이르는 동안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것은 일본 식민주의가 계속해서 도발하는 전쟁과 그 전쟁 밑에서 조성되는 정신적 물질적인 압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각박한 정세 밑에서도 그것에 반항하는 젊은 지성들의 움직임이 날로 늘어났으며, 어쩌면 이때는 오히려 우리의 잃었던 조국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그 의지로 버티어온 시련기였다.”(정점식,「화가의 수적」(자서적 단상-예술의 독학적 경험주의), 아트북스, 2002년, p223.)

50년대 대구화단은 기성의 가치관과 진취적인 의식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정점식은 후자 쪽의 선두작가이다. 모던아트협회의 주요 멤버였던 극재는 추상화의 발로로부터 대구지역 추상미술의 기틀을 잡고 이어온 화가이다. 대구화단에서는 중추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한국 추상미술의 시작과 전개에도 선두적인 역할을 한 존재였다.”(극재 정점식 탄생 100주년기념전/위대한 삶과 오래된 공간-학강미술관/서영옥 발제문 p3에서 재인용) 그런 그는 한국 미술계에서 모더니즘(앵포르멜과 모노크롬을 축으로 논의되는 형식주의적 모더니즘의 문맥) 미술가로 부각되면서도 동시에 주변화 되기도 한다.

극재가 출생하기 10년 전인 1907년은 대구에서는 서상돈, 김광제 등을 중심으로 한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해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이러한 사실은 극재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고 그의 유·청소년기 역시 일제강점기라는 편하지 않은 시기였음을 일러준다. 이후 1930년에 미술계에서는 김용준의 주도아래 향토회가 결성되고 작가들은 근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참고로 향토회(鄕土會)는 1930∼1935년 대구에서 서동진(徐東辰), 박명조(朴命祚), 최화수(崔華秀), 김성암(金星岩), 이인성(李仁星), 배명학 등이 모여 결성한 양화 단체이다.

극재는 20·30대 청년시기에 선배화가인 김용조, 배명학, 최화수, 서진달 등과 어울리면서 미술에 입문했다. “1930년대 대구 근대화단의 선배들인 김용조(金龍祚), 이인성(李仁星), 서진달(徐鎭達)로부터 유화를 접한 극재는 일본으로 가 교토에서 회화전문학교를 다니며 일본으로 유입된 현대미술을 경험한다.”<「화가의 수적」(자서적 단상-예술의 독학적 경험주의), 아트북스 2002년, p221~222.)> 이어 1944년 하얼빈에서 열린 하얼빈 미술협회전에 참여 후 1945년부터 1962년까지 5회의 개인을 갖는다. 광복 후 대구로 돌아온 극재는 지역화단의 모더니즘적인 추상회화의 토대를 다져 나간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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