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11) 일필휘지의 서체적 추상 두드러진 1980년대
[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11) 일필휘지의 서체적 추상 두드러진 1980년대
  • 황인옥
  • 승인 2018.06.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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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필적’·‘미풍’·‘누드’…
1980년대 서체 추상 활동 활발
스페인 화가 타피에스에 비교
역수입된 회화법 아니냐 의혹에
생몰 시기 통해 반발 근거 제시
극재의 육필원고
극재의 육필원고.

6월 27일 한 낮에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故극재 정점식 선생(이하 극재)의 첫째 딸(명주)의 전화였다. 그곳은 밤 12시, 잠을 미룬 반가운 목소리였다. 고인이 되어서도 극재는 이국만리에 사는 당신의 혈육과 대구의 제자를 한 가족처럼 엮어준다. 진심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던 중에 든 생각이다.

2009년 어느 봄날이다. 故극재 정점식 선생(이하 극재)이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C선생과 함께 동산병원으로 갔다. 생전에 극재는 C선생을 데레사라고 불렀다. 계명대학교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교수이자 극재의 제자인 데레사는 첫째 딸(명주)과는 친구 같은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살가운 딸들이 모두 미국에 있어 자주 볼 수 없는 극재에게 데레사는 딸처럼 극재를 극진히 챙기던 존재였다. 그런 데레사와 함께 병실에 도착했을 때 병실은 비교적 고요했다. 가습기에서 흘러나온 하얀 수증기만 병약한 환자를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병상에서 극재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래 왔나!”하며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를 반겼다. 기운 없는 극재에게 정이 많고 입담도 좋던 데레사가 창원에서 근무하는 또 다른 애제자와 함께 간 ‘바닷가 아카데미’ 등, 다양한 추억담으로 가라앉은 병실 분위기를 살릴 땐 간헐적인 미소로 화답을 했다. 시간이 되어 다시 오겠노라하고 병실 문을 나서는데, 꼭 다시 오라고하는 것 같은 눈빛배웅을 하던 극재.

다음날 필자는 적적할 것은 극재를 위해 책꽂이에서 책 몇 권을 뽑아들고 다시 병실로 갔다. 평생 책을 벗한 예술가였기에 책을 반가워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받아든 극재가 대뜸 “니는 이런 책 읽지 마라!” 하며 호통을 친다. 당황했고 적잖이 무안했던 순간이다. 그 책 제목은 법정스님의 ‘무소유’였다. 한참 후에야 알았다. 아직 할 일이 많은 젊은 제자가 조금 더 진취적인 책을 가까이 하길 바라는 스승의 마음을.

데레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인 극재의 딸(명주)과 통화한 내용도 논의할 겸 인터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준 데레사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극재의 궤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만큼 극재는 딸과 딸의 친구에게까지 아버지 이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선생님은 늘 말을 아꼈다. 당신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 남을 험담하거나 비방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인정에 이끌려 대사를 흐리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절연을 할지언정 옳지 않은 일에 동조하는 법이 없는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남의 어려움을 동정할 줄 알았던 내면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2018년 6월 27일, 데레사 인터뷰 내용 중)
 

극재 드로잉 판화
극재 드로잉 판화.

그 밖에도 아버지나 스승 이상으로 극재를 존경하고 따랐던 대구화단의 예술가들은 많다. 다음은 그들과 대화하며 틈틈이 기록해둔 인터뷰 내용이다.

“대구미술비평연구회의 고문이셨는데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어서 무척 안타깝다. 평소에 참 다정하고 앞선 안목과 열린 사고로 누구보다 대구 미술계에 애정을 보이신 분이다. … (2017년 6월 학강미술관 극재 탄생 100주년 기념전 미술평론가(전 대구미술비평연구회 대표) 장미진 인사말 중)

“극재 선생은 무척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이다. 겸손하고 지적이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추진력이 있고 내면이 깊은 예술가이다. 본받을 점이 많은 교육자이자 훌륭한 예술가이다.” (2017년 7월 12일, 전 대구대교수 권정호 인터뷰 중)

“선생님은 평소에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신 분이다. 미국에 갔을 때 따님 댁이 무척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만나러 달려오실 만큼 제자 사랑이 깊으셨던 분이다.” (2018년 1월, 극재의 유품을 정리한 작가 박철호 인터뷰 중)

“선생님을 모시고 전시회 오픈식에 종종 참석하곤 했다. 예술과 사람이 불가분하다는 것을 현장에서 말없이 가르쳐주신 분이다.” (2017년 9월 5일, 극재의 유품을 정리한 작가 차규선 인터뷰 중)

“참 외로운 길이 될 것이나 소신을 갖고 그 길을 가야한다. 극재 선생님의 그 짧은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미술계에서는 드물게 내 작품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어른이었다. 덕분에 큰 힘을 얻었다.”(2016년 5월 1일, 작가 금경 인터뷰 중)

미술 작품은 시대의 기록이다. 한국 미술의 원형적 정신은 무엇일까? 극재는 1980년대에도 이런 고민을 작품 속에 녹여낸 예술가이다. 작가 자신만의 주된 채색을 왜색풍이라고 날개를 꺾어버린 한국미술사의 흑역사도 있지만, 전통적인 수묵에서 벗어나 시대적인 고민과 작가의 예술적 고뇌를 담은 작품들은 1980년대 화단에서 제 목소리를 높여갔다. 극재에겐 그것이 현대적인 미를 추구하면서 형식에 구애되지 않은 추상미술로 드러난 것이다. 극재가 “예술은 작가의 개인적인 작업에서 시종(始終)되지만 그 목적은 개인적인 존재를 넘어 사회나 인간을 향해서 방사하는 메시지에 있다.” (鄭點植 畵集, 圖書出版美術公論社, 2008년, p.77)고 하였듯이 극재의 예술에서는 전통의 단절이 아닌 개인과 사회, 인간이 투영된 독창성을 간과할 수 없다. 고답적인 한국 화단에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마련한 기폭제나 다름없다. 새로운 물줄기 같은 역할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극재의 서체적 추상이 그렇다. 특히 198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서체적 추상은 마치 서예가가 붓을 휘두른 것 같은 일필휘지의 힘이 느껴진다. 제목에서도 뚜렷이 명시했다. 1989년과 1987년 작인 <필적>과 1986년 작 <미풍> 그리고 1986년 <즉흥> 등에서 강하게 그것이 느껴지며 심지어 각각 1989년과 1986년에 제작한 <누드>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혹자들의 의견도 허투루 듣고 넘길 순 없다. 극재의 서체적 추상이 서구로부터 역수입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페인 태생인 추상 표현주의 화가인 타피에스(Antoni Tapies, 1923~2012년)의 휘갈겨 쓴 글씨풍의 드로잉과 혼합추상화가 그렇다. 법률공부를 한 후 1946년부터 회화에 전념한 타피에스는 15세부터 예술과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몰시기로 보면 1917년에 태어나 2009년에 작고한 극재가 타피에스보다 선배임을 알 수 있다. 분명한 단서 외의 단순한 추측은 보류하는 것이 옳다다고 생각한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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