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길(The Way Back)
돌아오는 길(The Way Back)
  • 승인 2017.05.2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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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희 탈북민
인문학 강사
어느 주말 집에서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돌아오는 길(The Way Back)”(미국2010)을 보았다. 영화는 1940년, 동유럽권에 닥친 스탈린의 공산주의로 인하여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여기저기서 끌려온 다국적 죄수들이 죽음의 시베리아수용소에서 탈출하여 영국의 직할 식민지였던 인도까지 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흔히 “웨이 백”을 영화나 소설로 본 독자들 대부분은 시베리아의 눈 덮인 벌판과 고비사막, 히말리야 산맥의 대자연을 맨몸으로 걸어서 도전하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끈기와 인간의 존엄성에 감탄을 한다.

필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가슴에 커다란 레닌과 스탈린 초상문신이 새겨져있는 발카의 정체성이다.

일곱명의 죄수들이 탈출해서 시베리아를 헤매던 중간에 폴란드 여성 이레나가 일행에 합류해서 여덟 명이 시베리아·몽골·중국· 티베트·인도까지 무려 6천500km라는 길고 험난한 노정을 걸어서 가는 과정에 살아서 인도에 도착하는 죄수는 4명이었지만 소련공산주의의 영향밖에 있는 인도에 도착하는 사람은 3명이었다.

7인의 죄수 중 유일한 러시아인 발카는 가슴에 거대한 레닌과 스탈린 초상화 문신을 하고 있지만 소련공산주의에 순응하지 못해서 자신의 조국·소련정부로 인하여 인간생지옥과도 같은 시베리아 수용소에 끌려왔던 인물이다. 어쩌면 수용소를 탈출한 7인 중에서 가장 그 나라를 떠나고 싶었을 인물이 발카라고 생각했는데 감독은 의외의 설정을 두었다. 발카는 왜 국경을 넘지 않았을까?

1940년대 소비에트연방은 정치적으로는 레닌이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숙청되고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사회 곳곳에 공포의 분위기가 조성되던 시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2천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일의 침공을 막아내고 유럽전역에 공산주의가 전파되던 시기였다. 스탈린의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에 의하여 당시 소련의 공업생산은 미국에 이어 세계2위를 자랑하였다. 소비에트 인민들은 그런 조국에 대한 긍지감과 스탈린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모순 속에서 복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스탈린을 거부하는 반동으로 간주되어 숙청당하거나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발카는 이러한 시대의 소용돌이가 만들어낸 희생양이다.

언제나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발카이고 늘 불만이 가득 찬 것만 같은 굳은 표정의 발카, 어느 날 동료죄수들이 발카에게 “스탈린 초상을 엉덩이에 새겼으면 매일 뭉갤 수 있을 텐데~” 라는 농담을 던지며 웃을 때 그는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면서 이렇게 내뱉는다.

“너희가 그이를 알기나 해? 그는 부자의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준 사람, 위대한 사람이야”

급기야 발카는 그 험난한 시베리아를 살아서 탈출하여 몽골까지 와서는 “나에겐 자유가 어울리지 않아” 하면서 남는다. 이 장면에서 나는 정말 흥분하였다.

아마도 소위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북한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 가정은 79년도에 과학자인 아버지 덕에 남들보다 먼저 아파트를 배정받아서 주택에서 아파트로 입주하게 되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옛날에 지주도 이런 좋은 집에서 못살았다. 너희들은 어버이 수령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충성해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귀가에 쟁쟁히 들려오는 듯 하다.

그런데 “웨이 백”을 보면서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북한에서 그저 옥수수나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먹고 사는 형편임에도 수령을 찬양하던 할아버지와 스탈린을 욕한다고 동료죄수들에게 화를 내는 발카가 하나로 매칭 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북한 밖에서 바라본 사회주의는 “스탈린 동지의 말은 옳다”고 외치던 소비에트시대나 김일성은 태양이고 만민의 어버이라고 찬양하는 북한체제가 서로가 닮은 모습이었다. 그 수령들은 민중을 굶주림과 가난에 허덕이게 하면서도 수령찬양, 체제찬양이나 하게하고, 반항하면 숙청과 살인도 서슴치 않았다.

영화는 발카라는 캐릭터를 통하여 이러한 ‘사회주의’의 허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뇌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발카가 몽골국경을 넘지 않고 소비에트 령에 남았기 때문에 그의 자유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진짜 자유를 얻은 사람은 3명이라고 본다.

가깝고도 먼 북녘 땅에 살고 있는 부모형제와 수많은 고향사람들이 아직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필자는 “웨이 백”의 살아남은 세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을 떠나 제3국에서 떠돌이 살이 하는 수많은 발카(탈북민)들이 행복한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얼마나 멀고 험난할까를 생각하니 문득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되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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