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 여성혐오 살해를 기억하다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혐오 살해를 기억하다
  • 승인 2017.05.0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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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미 대구여성의전화 대표
‘해준 게 없어 미안하다고만 하시는 부모님 정말 감사하고, 더할 나위 없이 많은 것을 해주셨습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사랑합니다.. 늦은 시간에 전화하면 ‘고생했다, 사랑한다’는 이 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 감사합니다…’

2016년 5월 17일 오전 0시33분 경,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화장실에서 무참히 희생된 23살 꿈 많던 한 여성이 부모님에게 남긴 ‘부치지 못한 편지’의 일부분이다. 그녀는 용돈을 아껴 가족여행을 준비했던 속 깊은 딸이었고, 열심히 일했던 직장인이었으며, 듬직한 동료였고, 그녀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연인이었다. 범인은 범행 전 화장실에서 한 시간 남짓할 동안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여성인 피해자가 들어오자 살해했다.

사건 발생 후 가해자는“여자가 나를 무시해서”라고 범행동기를 밝혔다. 경찰 또한“여성을 대상으로 했다’, “그 때 들어온 다른 남성은 일부러 해치지 않고 내보냈다”라는 가해자의 명백한 진술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런데 경찰은 이 자명한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사건을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로 규정하여 본질을 호도했다. 또한 일부 언론은 남녀공용화장실이 문제라며 뜬금없이 화장실 문제를 들고 나왔고, 해당 사건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묻지마 살인’으로 보도했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가 성차별, 여성의 종속, 남존여비, 여성증오, 여성멸시와 유사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했다.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이 묻지마살인 보다 여성혐오살인이라는 정의가 정당한 이유는 가해자가 여성을 특정해 희생자를 삼았으며, ‘여성이 자신을 무시해서’라는 분명한 살해동기를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남역 살인을 ‘여성혐오살인’이라 분명하게 명명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사회에 아직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성을 향한 살인과 폭력의 원인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살인·강도·방화·강간 등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2013년 기준 90.2%에 달했다. 또한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2015년 언론에 보도된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 통계 분석에 따르면, 최소 1.9일의 간격으로 1명의 여성이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위협에 처해 있다. 가족 등 주변인의 피해까지 합하면 언론을 통해 보도된 피해만 연간 238건에 달한다(한국여성의전화, 분노의 게이지, 2016).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은 우리 사회의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극단적 형태인 살인으로 나타난 것이다.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성비하와 혐오를 동반하며, 신체적, 성적, 심리적 폭력 및 협박, 강제, 자유 박탈 등으로 행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 사건 이후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피해자의 추모 운동이 시작되었다. 사건 현장과 가까운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여성 혐오는 사회적 문제”,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등 여성 혐오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의 쪽지들이 나붙기 시작했다. 이 추모운동은 전국적인 물결이 되어 한국사회의 일상에 깊이 뿌리박힌 성차별과 여성혐오의 문제를 다시 환기시켰다. 특히, 피해자와 같은 연령대인 젊은 여성들의 성차별문제에 대한 자각과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작년 한 해 대구지역 젊은 여성들의 뜨거운 관심이 되었던 페미니즘열풍은 그러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자발적 추모 열기는 피해자 입장에서 자신을 동일시하고 혐오에 맞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해 피해자 입장에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그러한 동일시를 통해 도처에 널린 폭력들을 목격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중요하다.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는 목소리로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연대하며, 집단적으로 혐오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혐오와 차별의 극복에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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