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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달구벌아침

한 숟가락의 소금

기사전송 2018-02-19, 21: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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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수필가)


제법 튼실하던 몸이 삐걱댄다. 언제부터인가 벼랑으로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중년, 검진을 받으러 집 앞 보건소에 다녀왔다. 더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는 진단이 나왔을 때, 내 것이라 자신했던 몸이 낯설게 느껴질 때 가끔 우린 절박해진다.

몸이 건강했던 젊은 시절에는 좋은 음악 한 곡이 구원이 될 수 있었고, 한 줄 글에서도 마음의 위안을 찾기도 했지만, 무거운 눈을 이기지 못해 부러지고 마는 생가지처럼 어느 순간 우린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인 듯싶다. 내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만 몸이 원하는대로 하지 못했다. 치료 이전에 예방이 가장 좋은 방법인 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삶은 우리를 휴식의 자리에 머물도록 놓아두지 않은 채 불면의 연속이었다.

하루쯤은 마음이 머무는 자리를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거리 어디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를 떠올리며『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함석헌옹의 시 구절을 몇 번이고 되뇌어 본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얼굴 생각에/(…)”

겨울과 봄이 함께 공존하는 2월이다. 눈이 귀한 대구에 입춘 지난 오늘, 아침부터 눈이 왔다며 카톡을 날렸더니 친구로부터 답신이 날아든다. “오후에 마산 올래? 자가용은 두고 시외버스타고 오면 태우러 갈게. 학교 친구 만나는 거 취소해야하니 빨리 카톡 날려줘. 기다릴게.” 며칠 전 마산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며, 그 틈을 빌어 오래도록 소원했던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받느라 난리였다고 한다.

친구가 일러준 대로 버스에 올랐다. 글 쓰는 사람이니 지나가는 풍경들에 시선을 맡기고 마음이 흐르는 데로 기록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했다. 혼자 운전하느라 힘써야 하는 마음마저 다 내려놓고 버스에 편하게 몸을 맡겨 보라 한다. 겨울 끝, 봄의 시작을 알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2월은 내 마음처럼 아직은 불우한 풍경이다. 바깥의 풍경과 가슴 속 쌓인 상처들이 뒤죽박죽 얽히고설키더니 점점 바깥 풍경들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여행의 참 의미를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세르반테스는 ‘사람은 친구와 한 숟가락의 소금을 나누어 먹었을 때 비로소 친구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마중 나온 친구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사이다. 처음엔 다소 어색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끈끈한 우정으로 바뀐 이십년 지기 베프다. 섬세하고 조용한 사람이었고 여리지만 당찬 사람이었다. 어렵게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 덕분이라며 그 공을 늘 내게 돌렸다. 늦깎이로 공부를 시작해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녀와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공간이 생기자 굳게 닫혀 있던 상자 속 일곱 색깔 수다들을 풀어 헤쳤다. 좀처럼 내려놓지 못했던 좋지 않았던 기억들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출처를 알 수 없는 갱년기의 우울감도 함께 내려놓았다. 차를 나누며 풍경 좋은 곳에서 바닷바람을 반주삼아 먹고 마시며 시시콜콜한 일상의 얘기들과 한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스트레스도 날려 보냈다.

대구로 돌아오는 길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떠나올 때 보여주던 유리창 속 겨울풍경들은 간데없고 봄이 되어 피어난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내가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떠날 때는 바깥 풍경만큼이나 산란했던 마음이 돌아올 때는 어둠을 가린 차창이 오롯이 거울이 되어 나를 반추하고 있다.

‘살아온 날들을 명예롭게도 때론 비굴하게 하는 기준은 언제나 오늘’인 것처럼 친구는 내게 그런 의미가 되어 준다. 2월의 어느 날, 삶이 어떤 순간에 넓어지고 깊어졌었는지를. 또한 누군가가 곁에 있어 내 삶이 더 풍부해졌는지를 느끼게 해 준 하루처럼. 한 숟가락의 소금이 한 숟가락의 꿀이 된 짧은 2월이 차창을 획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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