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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달구벌아침

아네스의 노래

기사전송 2018-03-05, 22: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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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수필가)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 (...)”

이창동 감독이 직접 썼다는 시 ‘아네스의 노래’ 일부분이다. 요즘 따라 이 시가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이유는 뭘까? 2010년에 상영된 윤정희 주연의 영화 <시> 속에는 집단 성폭행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 미자의 외손자와 친구들은 한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한다. 피해자인 여학생은 충격을 받고 강물에 뛰어듦으로서 가해자인 세상과 결별 하고 만다. 가해자 부모들은 모여서 각자 500만원씩 합의금을 마련해야 했지만 간병 도우미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미자의 입장에서는 버겁기만 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교감, 죽은 여학생의 담임, 학생주임과 6명의 학부모 그리고 경찰만이 알고 있어야 했으며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가 어떻게든 합의만을 원했다. 여학생 부모는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가해자 부모들의 비뚤어진 인식은 마침내 ‘남자는 그럴 수 있지’ 오히려 여학생의 잘못이라는 뉘앙스를 내비친다. 세상의 모든 딸이며, 아내이며, 어머니는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무엇이 그리도 당당할 수 있게 한 것일까. 반성의 기미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손자와 학교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교사들 그리고 다른 가해학생 아버지에게 미자는 재차 묻는다. 500만원으로 “이젠 모든 게 끝난 건가요?”라고.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을 향한 시선들이 왜곡되고 있다. 그 중심에 여성들도 한몫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늘 듣던 말은 여자는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바지나 짧은 치마라도 입고 나서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말만한 처녀가 허연 다리를 다 내놓고 깨댕이 벗고 다닌다”며 나무라곤 하셨다.

아들을 키울 적, 다리와 다리사이 가랑이가 트인 옷이 있었다. 60~70년대를 거쳐 왔거나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사용해 보았을 일명 ‘밑 트임 바지’는 걸음마를 배우기 전후의 아기들에게 입혔던 옷이다. 배변 훈련이 되지 않았던 때, 대소변을 편하게 볼 수 있게 했던 옷이다. 엄마들의 입장에서 보면 빨랫감이 줄어드는 것도 있고 바람이 잘 통해서 좋았을 뿐 아니라 어쩌면 바지를 내리지 않고도 대소변을 처리할 수 있어 편리했던 옷이다. 하지만 밑 트임 바지는 남자 아이만의 특권이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 했던가? 생각해보니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움을 모르도록 키운 건 어쩌면 아들을 가진 엄마들의 잘못일지도 모른다. 가랑이가 터진 옷을 입히고 기저귀도 채우지 않은 채 깨댕이를 벗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웠고 은근 어깨에 힘들어 간 것처럼 당당했다. 그런데 딸아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숨기고 가리기에 바빴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것이 차별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세월이 많이 변했다. 양성이 평등한 시대라고 하지만 현실은 여성들의 손해와 책임이 더 많은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법조계와 문화예술계를 넘어 학계와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번져가고 있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영화 <시>를 떠올렸다. 미자는 가해자의 보호자로서 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같은 여자로서 똑같이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처지에 있음을 실감 했을 때, 자살한 피해자 소녀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더욱 미자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미자는 죽은 소녀와 오버랩 된다. 미자의 시는 우연히 다리에서 투신한 소녀 이야기를 듣고 또 울부짖는 소녀의 어머니를 목격하게 되고, 중학생인 손자와 친구들이 소녀의 죽음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되는 접점에 있다. 아름다운 시는 냉혹한 현실의 응어리였던 것이다.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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