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유감(有感)
새해 유감(有感)
  • 승인 2017.02.12 12: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사윤 시인
설날을 맞이하여 설렘을 안고 고향으로 가는 귀향 차량들로 올해에도 어김없이 도로 곳곳에 정체와 지체가 반복되는 구간들이 많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를 통해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을 활용해서 우회도로를 많이 활용하면서 예전처럼 서울 부산 간에 15시간 운행이라는 살인적인 과로운전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물론 전용차로제도 많은 기여를 했지만, 실업률 최고 기록 갱신 등을 비롯한 경기의 악화로 인한 귀향 객들이 다수 줄어든 점도 크게 한 몫으로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신데렐라’와 ‘빌게이츠’를 꿈꾸던 수많은 청년실업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선 ‘나’를 믿고 기다리는 부모님에게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이고 친지들의 우려가 오히려 사기진작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모처럼 만난 형제자매간에도 해를 거듭할수록 대화가 줄어들고 본가로 모여든 가족친지들이 차례 상을 물리고 나면 기계적인 설거지와 기름기 가득한 차례음식들로 더부룩한 속을 채우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린 손주들의 등살에 거리로 나서면 설날 연휴로 대부분 문을 닫아서 갈 곳도 마땅치 않고, 집으로 돌아오면 사춘기를 맞이한 손주들은 PC방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면 마침내 처음처럼 노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크게 달가워하지도 않는 차례음식들을 자녀 순대로 나누어서 짐을 싸다가 보면 어느새 연휴 마지막 날이다. 모든 집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집이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 같다.

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전해져 왔다. 최남선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설의 뜻은 ‘슬프다’는 뜻이지만 한편으로는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의 옛말 ‘섧다’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해 왔고, 안동대 임재해 교수는 1년 동안 기다려온 명절을 서러운 날로 보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견해라고 전제하고 「설」이란 해가 바뀌어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국 민속 학회가 발행한 「한국 민속학 연구 7집」에 「설 민속의 형성근거와 시작의 시간 인식」이란 논문을 발표하고 이 같은 학설을 제기한 바 있다. 설날은 일 년 내내 아무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행동을 조심하고 그 해 농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축원을 하는 날이었으며 원시시대 금제(禁制)의 유제(遺制)일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아직도 이렇다 할 정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명절로 민족 대이동을 불사할 수 있는 바탕에는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설렘이 크게 자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설은 봄, 신춘을 맞기 위해 인간이 얼마나 조심하고 근신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주는 말이기도 하고, 익숙해진 한 해를 보내고 새롭고 낯선 해를 새로운 다짐과 함께 시작한다는 의미가 크다.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소중한 우리 민족 고유의 「설날」이 언제부터인가 우울하다. 십 여분 남짓한 차례를 지내는 상을 준비하는데 드는 비용이 마트 35만원, 재래시장 27만원이라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비용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차림의 주된 노동력이 여성에게 편중되어 있다는 불만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이것도 옛말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엄중한 위계질서가 구축(?)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고, 맞벌이 부부의 일반화로 인한 여성들의 경제적인 성장으로 인해 이미 남성들의 명절 전후 아내 눈치 보기가 이에 버금가는 스트레스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불현 듯 궁금하다. 도대체 ‘설날’은 누구를 위한 명절인가? 학설처럼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서러운 설날은 고인(故人)들을 위해 살아있는 후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인가. 필자는 실로 안타깝다. 추모(追慕)는 ‘산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차례(茶禮)이다. 차 한잔을 올려서 예의를 다하는 마음이다. 부담을 가지고 몸살을 앓아가면서 본인과는 무관한 고인들의 상차림으로 ‘명절증후군’에 며느리들이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설날’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멀리 떨어져 지내는 친지들이 모여 고인들에 대한 즐거운 에피소드를 함께 나누면서 차 한잔 나누는 그런 자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교의 산탄(霰彈)에 맞아 후손들이 노동과 부담으로 신음하는 심각하고 의미 없이 진지한 차(茶)없는 차례(茶禮) 상을 언제까지 고인들과 마주해야 할지 고민이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