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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대구논단

김밥가게 아주머니

기사전송 2018-05-15, 21: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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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전통시장을 낀 아파트 입구의 김밥가게에서 칼국수를 먹은 적이 있었다.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나에게 주인아주머니는 ‘헤어스타일이 정말 멋있다’며 디자인을 바꾸지 말고 계속 유지하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나의 뇌리에 고스란히 머물러있다. 우연히 들른 손님에게 그렇게 기분 좋은 말을 해줄 수 있다니. 긴 생머리를 한 가닥으로 묶어 올린 단정한 얼굴에, 표정 또한 밝고 건강하게 보였다.

그리고 한 달쯤이나 지났을까. 다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나에게 좋은 말을 해준 그곳으로 발길이 저절로 옮겨졌다. 손님이 없는 텅 빈 식당에서 나 혼자 이어폰으로 팝송을 들으며 비빔국수를 먹고 있었다. 잠시 후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돌아보니, 잘 아는 단골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아주머니는 그 손님과 이성 친구 대하듯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근래 들어 자신이 좀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다 털어놓을 심산으로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운전을 하다가도 골목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려움이 엄습해 당장이라도 운전대에서 내리고 싶을 정도라고.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쫓기면서 살아야 되느냐’며 눈물이라도 펑펑 쏟을 기세였다. 지난 세월 돌아보면 집이나 헬스장, 가게 등 어디에서도 여유를 갖고 살아본 기억이 없다고.

그 손님은 시장 주변에서 해산물을 판매하는 노점상인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하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적당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며, 너무 매여 살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자신의 우울증 약물 복용 경험담을 들려주며, ‘결국은 마음먹기에 달렸더라.’며 진지하게 대화에 응해주는 자세가 정말 오랜 친구처럼 믿음직스러웠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다른 손님이 들어오니, 주저 없이 일어서서 평상시와 같이 아무 일 없는 듯 웃으며 김밥을 말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프로의 경지를 대변해주었다. 그래, 28년이나 이런 생활을 해오고 있다는데 두 얼굴 아니라 세 얼굴이면 어떠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정작 자신의 속은 쓰리고 아프면서도, 손님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프로 근성. 불현듯 그것이야말로 속병을 키우는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살다보면 드러낼 일도 있고, 적당히 감추어야할 일도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을 자꾸 안으로 수그러들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오늘따라 한가하게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왜 그리 부러운지 모르겠더라.”며 두 번이나 연거푸 울먹이듯 말하는 아주머니의 탄식에,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이어폰을 꽂고 돌아앉아 있었으니, 듣지 않는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어설 때는 따뜻한 덕담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생활 이야기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 안고 돌아왔다.

요즘 수저 이야기가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빈부의 차이가 계급 차별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갑질을 대물림하다가 망신을 당하고 있는 일가족만 보아도, 수저의 색깔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종류의 색깔이 묻어있다. 몇 년 전, 웃음치료사로 활동하던 인기 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만 해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밝고 건강하게만 보이던 아주머니의 가슴 속에 그런 아픔이 서려있다니. 정말 그 손님의 조용한 충고처럼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 옳은 말인 것 같다. 긍정적인 생각과 적당히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 조금 부족하더라도 현실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는 지혜….

인간사 새옹지마, 무심히 듣고 넘겨야할 남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주변을 돌아보아야할 ‘가정의 달’이어서 그런지 자꾸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어려운 속내를 터놓을 수 있다는 것은 치유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 다음에 그 아주머니를 만나게 될 때는 한결 가벼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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