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만 했지 쓸 데가 없다(大而無用)
크기만 했지 쓸 데가 없다(大而無用)
  • 승인 2017.09.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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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전 중리초등학교 교장
얼마 전 마광수 교수가 자살했다. 작품 ‘즐거운 사라’가 외설 시비로 재판을 받았다.

담당검사는 “이 작품은 문학이 아니다”고 하였다. 마광수 교수는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대학에서도 쫓겨났다. 마광수 교수의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우여곡절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마광수 교수는 2016년 대학에서 퇴임을 하면서 아마 우울증이 더 심해진 모양이다. ‘죽기 전에 대한민국이 솔직해 지는걸 보고 싶다.’고 말했던 그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혜자가 친구 장자에게 말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나무를 가죽나무라고 부르네. 왜냐하면 그 큰 줄기에는 혹이 더덕더덕 붙어 있어서 목수들이 먹줄을 칠 수가 없고, 작은 가지들은 뒤틀려 있어서 도저히 ‘규구(規矩)’를 갖다 대고 잴 수가 없다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네. 지금 자네(장자)의 훌륭한 말도 ‘대이무용(大而無用)’이네. 모든 사람들이 자네를 상대도 안할 것이네.”

대이무용(大而無用)은 ‘크기만 했지 쓸 곳은 없다.’는 뜻이다.

동네에 있는 그 큰 나무를 쓸모가 없는 가죽나무라 부르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작은 가지들은 뒤틀어져 있고, 큰 줄기에는 옹이와 같은 혹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목수들이 보기에도 먹통을 가지고 먹줄을 튀길만한 큰 줄기도 보이지 않고, 자귀를 가지고 다듬고 쪼아야 할 작은 가지조차 없다면 쳐다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크기만 했지 쓸 데가 없는 것이다.

혜자는 ‘장자의 언행들이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귀담아 듣지 않고 말벗조차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였다.

장자가 혜자에게 대답하였다.

“지금 자네는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 곳이 없다고 근심하고 있네. 그 큰 나무를 어째서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 광막한 들판에다 심어놓지 않았는가?

그리고 하는 일 없이 그 나무 곁을 왔다 갔다 하거나 혹은 그 나무 아래에서 어슬렁어슬렁 거리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는가?

어떻든 그 나무는 도끼에 일찍 찍히지 않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그 나무를 해치지 않을 것이네. 쓸데가 없다고 해서 어찌 마음의 괴로움이 되겠나?”

장자의 대답은 ‘쓸 데가 없는 무용도 크게 쓰일 수 있다.’는 이치를 설명하였다. 장자의 아무것도 없는 고장이란 의미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은 ‘없음의 이상향’을 말한다. 생각한 것을 생각하는 인지과정으로 보면 문제의 답은 혜자의 물음도 장자의 대답도 될 수 있다.

천자문에 ‘구보인령(矩步引領)’이라는 말이 있다. ‘자로 잰 듯 걸음을 바로 걷고, 따라서 얼굴도 반듯하게 위의를 당당하게 하라.’는 뜻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일찍 배운 것을 아주 빨리 잊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으리라.

누구에게나 말 못할 답답함은 있다. ‘크기만 했지….’는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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