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마른 수염이 서로 몸 비비고 있는
그 속으로 어둠을 닦는 빗줄기
그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각의 땅
그 다문 입술이 살포시 벌어지는 입구
억새는 언덕을 한 무리로 올라
바람을 억수로 불러 모으려고
어둔 산자락 멀리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는 시골동네 불빛처럼
12월 대설 뒤쯤
눈발 속에는 빗방울과 뇌성이 머물러 있다
입구를 찾을 수 없는 언 땅
사람들을 쫓아낸 들녘을 가로지르는
시멘트 농로 위로 어제의 시간들이 단풍들어
상해 버린 낙엽들
억새 모진 뿌리 밑을 덮고 있다
◇제왕국 = 경남 통영 출신
시민문학협회 자문직을 수행
한국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등 활동 중
시집 <나의 빛깔>, <가진 것 없어도> 등
<해설> 겨울 능선에 비가 오고 가을을 입은 바람이 억새를 흔들고 있다. 그 언 땅을 부드럽게 녹이듯 어둠을 닦는 빗방울, 그때부터 억새는 속으로 울던 울음 뚝 그치고 비로소 얼었던 속내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덕에 한 무리로 몸 비비며 사는 억새 그 속으로 찬란한 빛이 쏟아지면서 생의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추수 끝난 들녘의 리얼한 감성이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코믹한 언어들이 이 詩에 정갈하게 녹아 서정성의 미학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성군경(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