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고 분한 사람들 마음 달래는 ‘긍정의 사나이’
억울하고 분한 사람들 마음 달래는 ‘긍정의 사나이’
  • 남승현
  • 승인 2014.05.1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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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 하성협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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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서울대 법대에 진학후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 변호사가 된 하성협 변호사는 최근 대구지방변호사회와 시교육청이 맺은 /news/photo/first/201405/img_130555_1.jpg'1학교-1변호사/news/photo/first/201405/img_130555_1.jpg'에 참여했다.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 다시 보니 사제복을 입어도 어울릴 듯한 인상이었다. 하성협(46) 변호사는 지난 3월 변호사 사무실을 연 ‘따끈따끈’한 변호사다. 직장생활을 접고 30대에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 경북대학교 로스쿨 1기 졸업생으로 지난 2012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는 웃을 때면 신부같은 혹은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대중음악평론과 라디오 DJ의 꿈을 간직한 하 변호사는 ‘잘 들어주고’ ‘따뜻한’ 변호사가 되고 싶다 한다. 긍정과 공감의 힘을 믿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원래 꿈은 신부님?
사춘기 시절 종교에 대한 열망 넘쳐
신학대 원했지만 집안 반대로 포기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

하 변호사는 경신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신학대에 진학, 카톨릭 사제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그때까지 성당활동도 열심히 하고 신부님이 되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서 학교 공부를 거의 안했다”며 “누나만 4명 있는 집에 독자다 보니 집에서 반대가 너무 심해 포기했다”고 했다.

신부님 외에는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기에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도 억지로 했다. 1년 재수를 하고 경북대 경제학과에 합격한 하 변호사.

“어느 과에 갈지도 신경 안쓰다가 가족들이 경제학과를 추천해 합격했지만 사실 당사자인 나는 덤덤했다” 고 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은 그를 완전히 바꿔놨다. 종교에 대한 열망으로 순진하기만 했던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는 사회를 접하고 그 가치를 알게된 것이다. 반면 신부님이 되고 싶었던 청년은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됐다. 대학 시절 학과 학생회장도 하고 성당의 교리 교사 회장도 하는 등 학내 생활과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해왔지만 그 간극은 커져만 갔다.

그는 “당시엔 종교가 특별히 사회적 약자 편인지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스스로 종교와 화해할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24살때부터 종교를 접고 지금도 안가고 있다”며 “이제는 종교가 나름의 사회적 역할을 한다고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대학과 종교만 알던 그는 사회에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대학 진학 후 또 다른 삶의 가치 발견
직장생활 접고 서울대 법대 진학
진지한 고민끝에 변호사 되기로 결심


◇변호사를 꿈꾸다

1994년 졸업을 앞두고 하 변호사는 경일투자금융에 취직을 했다.

“당시만 해도 워낙 취직이 잘돼서 과사무실에 우연히 들렀다가 3명 추천에 한사람 모자라 ‘땜빵’으로 원서냈다가 합격했다.”

그는 회사 입사 후 첫날부터 “내가 평생 이일을 하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비로소 그때부터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는 그는 “변호사가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당시 여자친구)와 가족들과 의논을 했다”고 했다.

결론은 3년만 직장생활을 해보라는 것. 어떤 일이든 3년 정도는 해봐야 그 분야에 대해 어느정도 배우고 나오는 것이라는 아내의 의견을 적극 수렴했다. 1997년 3월 꼬박 3년을 채우고 퇴사했다.

결혼한 지 4개월만에 퇴사한 그는 법대를 진학하기 위해 대구의 한 재수학원에 30살의 나이로 들어가게 됐다.

그는 “법전도 한번 본 적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할 엄두가 안났다. 법대를 가려고 마음 먹고 나니 이왕이면 서울대 법대를 가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10년 만에 시작한 수능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수학 기호도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였다. 수학에만 매달렸는데도 첫 해에는 만족할 만한 점수를 얻지 못했다”고 했다.

1년 더 수능을 준비했다.

“직장생활을 하듯 매우 규칙적으로 공부했다. 평일에는 밤 9시 30분까지만 하고, 토요일에는 오후 2~3시에 공부를 끝내고 꼭 아내를 만나 영화를 보거나 데이트를 했다.”

그 당시 매주 영화를 봐 태어나 영화를 가장 많이 봤던 시기라며 웃던 그는 “1999년 수능보기 전날 마지막으로 수학문제를 풀고 연필을 내려놨을 때를 잊을 수 없다”며 “목표로 했던 점수가 나올 거라 확신이 들었고 실전에서도 전혀 떨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2000학번’으로 서울대 법대생이 된 하 변호사의 시련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그는 “3년 반만에 조기졸업할 때까지 매주 대구에 안 내려온 적이 거의 없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빽빽하게 수업을 듣고 목요일 저녁에 무궁화호를 타고 대구에 와 월요일 새벽에 올라갔다. 형편상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아내와 아이가 보고 싶어 공부와 서울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일주일에 3일은 서울, 3일은 대구, 하루는 기차와 지하철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는 그는 졸업과 동시에 뒤도 안돌아보고 대구에 내려왔다. 법대만 가면 변호사가 되는 줄 알았던 30대 중반의 하 변호사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마음껏 풀어내기라도 한 듯 대구에서 긴 백수생활을 맞이하게 됐다.

30살에 재수학원 등록…3년간 공부
고달픈 타지생활…아내 격려로 버텨

◇꿈을 향해 터벅터벅 걷다

대구에 돌아와 아내와 어린 아이와의 시간이 매일 즐겁고 행복했지만 사법고시는 점점 멀어져갔다. “다른 표현이 없어 ‘백수’라고 했지만 사실 육아도 함께 하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너무 좋았다”는 하 변호사는 ‘즐거웠던’ 백수생활을 하던 중 마음을 다잡고 2008년 신림동 고시촌에 방을 잡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고시생이 되고자 서울에 온지 며칠이 지났을 때 정부의 로스쿨 설치 대학이 발표됐고 그 중 경북대도 포함됐다. 하 변호사는 대구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경북대 로스쿨을 갈지 고민이 돼 법대 동기들과 교수님들께 의견을 물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지도교수로 법대 재학 내내 하 변호사가 힘들어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조국 교수가 로스쿨을 추천하자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들은 듯 그는 그날로 신림동 집을 정리하고 로스쿨을 지원했다. 경북대 1기 로스쿨 입학생이 돼 지난 2012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6개월간 법무법인 삼일에서 수습시절을 거쳐 2년여간 근무하고 지난 3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가 이처럼 평범하지 않은 긴 시간을 지나올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그저 터벅터벅 걸어왔을 뿐”이라며 “가장 큰 동력은 마음이 내킬때까지 기다려 준 아내의 용기와 어려울 때 긍정적이 되는 타고난 성격 덕분”이라고 말했다.

◇따뜻한 변호사가 꿈

40대 중반에 접어든 하 변호사는 어떤 변호사를 꿈꿀까. 그는 ‘삼일’에서 일할 때 ‘상담전문 변호사’라는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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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변호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대체로 의뢰인이 사무장과 상담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직접 듣는 편이다. 의뢰인이 내게 일을 맡기든 아니든 귀기울여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이 많이 풀리는 것 같다. 어려운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고 했다.

‘따뜻한 변호사’를 꿈꾼다는 그는 입시생일때도 유지했던 8시간 수면을 반납중이다. 낮에는 주로 상담과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일은 밤에 할 수밖에 없는 노릇. 그는 “야근이 잦아져 일요일이 되면 녹초가 되기는 하지만 찾다찾다 내게 일을 맡긴 의뢰인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힘이 난다. 변호사를 시작하고 가족 외에 의뢰인들도 내 삶의 동력이 됐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물씬 묻어나는 그는 “사실 변호사는 두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었다”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는 “어릴때부터 가요와 팝을 좋아해서 대중음악평론가나 세션맨, 특히 라디오 DJ를 하고 싶었고 지금도 기회가 된다면 꿈꾸고 있다. 악기는 하나도 다루지 못하지만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서울대 재학 당시 대학가 외에 서울 시내로 외출한 일이 열손가락에 꼽힌다는 그는 “그것도 대부분 LP판을 사기 위해서였다. 종로, 회현동 등 LP를 구해 듣는 게 낙이었다”며 “지금도 집에 500여장의 LP판을 가지고 있어 틈나는 대로 듣곤 한다”고 했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 그는 “가수 김창완의 음악과 그의 이야기들에 위안을 얻고 존경하고 있다”며 “언제가 됐든 음악이야기와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을 쓰거나 운이 좋다면 라디오 DJ도 해보고 싶다”고 수줍게 웃었다.

무엇이 됐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전했다. 얼마전 대구지방변호사회가 대구시교육청과 학교폭력예방 및 안전한 학교 만들기를 위한 1학교-1변호사 결연사업에 참여, 초등학교와 중학교 1곳씩의 법률 자문위원을 맡게 됐다. 마지막으로 그는 변호사를 희망하는 이들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는 “변호사를 꿈꾸는 이가 있다면 첫째로 적성에 맞아야 하고 직업의 특성 상 사회에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지만 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남승현기자 namsh2c@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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