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응학생 붙잡고 高3 앞길 열어주고… 40년 한결 같은 ‘제자 사랑’
부적응학생 붙잡고 高3 앞길 열어주고… 40년 한결 같은 ‘제자 사랑’
  • 남승현
  • 승인 2015.01.2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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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 이종수 대곡고 교장
울진 최북단 죽변종고 진학반 담임
5년간 70여명 서울대·연·고대에 보내
어려운 제자들 아버지같이 보살펴…
세월 흘러도 끈끈한 사제의 情 나눠
전국 최초 에듀힐링 연수·Wee스쿨 개교
대구교육연수원, 3년 연속 최우수 표창
복수담임제 등 대안교육 활성화 앞장
대곡고교장
그래도 스승은 있다.

올해 2월말로 명예퇴직을 신청한 대곡고 이종수 교장은 유머와 위트가 있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모든 직원들을 원만히 잘 이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체구가 작은 그를 ‘작은 거인’이라 일컫는다. 이종수 교장은 이런 리더십을 바탕으로 늘 큰 성과를 얻곤 했다. 시·도교육연수원 평가에서 전국 유일 3년 연속 최우수 표창과 ‘마자교’개교에도 앞장섰다.

그는 교육연구사, 장학사, 장학관 등 교육전문직을 두루 거치면서 현장교육 지원 체제 구축과 국가교육정책의 선도적 추진으로 교원의 전문성 신장과 교육행정의 효율성 증대를 위해 매진했다. 더구나 각종 평가 및 선발시험 출제위원장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교육활동을 적극적·창의적으로 전개해 교육개선과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교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공교육의 내실화와 신뢰받는 학교상 정립을 위한 학교관리자로서의 역할 수행에도 탁월함을 보여 왔다.

특히 2012, 2013학년도 대구교육연수원 원장 재임 시, 탁월한 리더십으로 연수원 운영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켜 전국 최초의 에듀힐링 연수 개설, 생애 주기별 맞춤형 연수 개설, 영남권 최초의 Wee스쿨 개교 등으로 교직원의 자존감과 자기효능감 향상, 수요자에 맞는 개별화·전문화된 연수 과정 개발 적용, 학교 부적응학생에 대한 맞춤형 교육 실시 등으로 전국 16개 시·도교육연수원 운영 평가에서 2011, 2012, 2013년도에 걸쳐 전국 유일 3년 연속 최우수 연수기관 표창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4년 4년 연속 최우수 표창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약 40년간의 학생 교육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부적응학생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바탕으로 2013년 영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시교육연수원에 위기학생 치유와 회복을 위한 대구 Wee 스쿨 ‘마음이 자라는 학교’를 개교하면서 학교 운영 방향, 학교 철학,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 등을 총괄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위기학생 돌봄과 치유를 위한 복수담임, 멘토-멘티제, 체험중심 교육과정 편성·운영 등은 타 Wee 스쿨에서 벤치마킹할 정도로 대안교육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비록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도 대구교육청 관내 중학생 중 학교생활 적응에 가장 힘들어 하는 40여 명의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 즐겁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을 큰 보람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죽변, 오지에서의 열정적·헌신적 진학지도

이종수 교장은 교직생활 40년을 교사로, 교육전문직으로, 학교 관리자로 다양한 길을 걸어오면서 그 중 교사 시절이 가장 행복했고 보람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 교장은 “교사 시절 25년 중 대부분을 일반계고 3학년을 담임하면서 제자들의 진학과 진로지도에 헌신적·열정적으로 매진해 많은 제자들에게 적성과 희망에 따른 진로를 열어주었다”며 “그들이 지금 사회 곳곳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맡을 수 있게 했으며 그렇게 맺어진 사제 간의 관계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돈독해져 지금도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어 그것이 가장 자랑스럽고 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1981년부터 1987년까지 근무한 경북 울진 최북단 죽변종합고등학교에서의 교직 생활을 가장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 때의 기억들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함께 한 학생들의 이름은 물론 가족 상황, 그들의 행동까지 하나하나 파노라마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으며, 그 후의 교직생활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 교장은 “1981년 젊은 나이에 저 바다가 있는 곳이라는 막연한 그리움에 이끌려서 죽변종합고등학교를 희망해 갔었다. 당시 이들의 고달픈 삶은 대대로 세습돼 왔다. 부모님들의 직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노력에 비해 그들의 삶은 너무나 힘겹고 고달파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좀더 넓고 다양한 세상으로 내보내야겠다는 강한 책무감과 사명감을 느꼈고, 이를 대학진학을 통해 실현시켜 주고 싶었다. 일주일간의 예고 기간을 주고는 곧바로 학생들을 아침 6시에 등교시키고 밤 11시 하교시켰다.

“아침 6시 등교, 밤 11시 하교!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정말 나쁜 선생이었다. 몹쓸 짓을 한 것이다. 그것도 교통 불편한 시골에서 말이다.” 이 교장은 미안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그리고 담임이 하나가 돼 노력한 결과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모의고사 성적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학력고사 만점은 340점으로 모의고사 280점만 되면 체력장 점수 20점을 더해 300점, 전국 고득점 범위에 들었다.

그런데 6월부터 그가 맡은 학급 50여 명에서 3명이 그에 육박하는 점수를 받은 것이다. 사실 죽변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가 강릉과 포항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까지 유학 보낼 형편에 있는 가정이 거의 없어 인재 유출이 없었다. 게다가 상과반 4개 반에 인문반 1개 반이 있었으니, 소위 진학반인 인문반에 우수한 학생들이 소복이 모여 있는 셈이었다.

흙이 묻어 있는 소중한 보석을 닦아주니 비로소 반짝반짝하는 원래의 모습이 나타나듯이, 재능이 가려진 이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자극을 주면서 지도해 나가자 금방 그 본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결과 진학반을 맡은 5년 내내, 전문대를 제외하고도 매년 서울대, 경찰대, 연·고대를 비롯해 평균 15명(진학반 학생 수는 매년 50명 내외였다고 함) 안팎의 학생들이 주로 서울지역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끈끈한 사제관계

이 교장의 이같은 헌신적인 제자 사랑은 성공적인 진로지도에만 그치지 않고,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사제 간에 점점 더 돈독한 유대관계 형성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수험생활 중, 아버지가 배 사업 실패로 재산을 날리고 위암까지 걸려 고생하다가 공교롭게도 대입체력장 시험 치던 날 사망, 어려워지 김모 군의 마지막 공납금을 대신 해결해 줘 무사히 졸업시킨 뒤, 서울 모대학교 4년 전면 장학생으로 입학시켜 겨우 안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해 4월 어느 날, 자신의 더 큰 꿈을 위해 다니고 있던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죽변에 내려와 재수하겠다는 뜻을 밝힌 그를 호되게 꾸짖은 뒤, 그 다음날부터 후배들이 공부하는 교실에 책상을 한 개 더 마련해 정규수업이 끝나면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고 모의고사도 치게 하는 등 재수생활을 돌봐줘 마침내 경찰대학에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시켰다.

그 후로 줄곧 이 교장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가족을 이룬 후에도 해마다 솔가하여 수차례 서로 내왕하면서 한 식구처럼 지내는 그는 지금은 경찰청에서 촉망받는 고위간부로 재직하고 있다.

이 교장은 서른일곱 살 젊은 나이에 첫 주례를 섰다며, 어쩌면 최연소 주례자가 아닐지 모르겠다며 겸연쩍어 했다.

죽변종고 제자의 끈질긴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젊은 나이에 첫 주례를 선 후, 한사코 매달리는 제자들의 막무가내에 죽변종고 제자들만도 50여 쌍이나 결혼 주례를 맡았다고 하면서, 지금도 그들과 서로 연락을 하며 인생의 멘토로, 때로는 친구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현재 대곡고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도 변치 않고 있다. 1천300여 명 학생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고 힘주어 말하며 그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 해 부임하자마자 교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위치에 ‘이곳은 장차 귀인이 태어날 곳입니다’라는 문구를 큼지막하게 붙여놓고 항상 교문을 드나들 때 가슴에 새기게 함으로써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고 있다고 했다.

◇40년 교직생활을 돌아보며

이 교장은 정년 1년을 앞두고 2월 말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영예로운 정년퇴직을 꿈꿔 왔으나 교장 승진 자리가 적어 답답한 시교육청 중등인사에 숨통을 틔워주고, 또 능력 있는 후배들이 마음껏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고심 끝에 명퇴 결심을 했다.

퇴임 후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평생 뽕잎만 먹고 자란 누에가 뽕잎을 떠나서 무얼 찾겠느냐”며 당분간은 조용히 혼자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직생활 40년이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그는 “이제 교육 현장에서 한 발 물러서서 우리 대구교육, 나아가 대한민국 교육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동안의 제자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기원하며, 교육자로서의 역할과 본분을 잃지 않고 살겠다.”고 말했다.

이종수 교장,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요즈음, 교육자로서 우리 시대의 귀감이 되고 있는 그를 통해 오늘날 교육의 길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면서, ‘그래도 스승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남승현기자 namsh2c@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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