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흔적따라 이육사 삶 쫓아…시간을 간직한 도시
퇴계 흔적따라 이육사 삶 쫓아…시간을 간직한 도시
  • 황인옥
  • 승인 2017.08.3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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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순의 '역사·문화 숨결 따라'-<끝> 안동시
성리학 집대성 조선시대 대학자 이황
태어난 방부터 제자 가르친 서당까지 보존
일제 만행에 時로 저항
민족시인 이육사의 고향
서애 류성룡 사당 모신 병산서원
빼어난 조형미·풍광 자랑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 전경.

안동 하면 ‘유교의 본향(本鄕)’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만큼 유교의 전통문화 유산이 가장 풍부한 고장이다. 그래서 의(義)와 예(禮)를 중시하며 학문의 큰 족적을 남긴 역사적 인물도 많고 그들이 남긴 학문의 전당이었던 서원의 숫자도 전국에서 으뜸이다. 그와 함께 민중들의 삶의 미학을 담은 민속문화도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즐기고 있다. 볼 곳 많고 배울 것 많은 지붕 없는 전통 역사 박물관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따라가 보자.

도산서원
도산서원.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대학자 퇴계 이황

퇴계 이황은 동방의 주자(朱子)로 숭앙 받는 역사적 인물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숙부에게서 글을 배우고 혼자 독서하기를 즐겨하면서 ‘논어’등 사서삼경을 두루 공부하며 총명한 자질을 키웠다.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22살 때 성균관에 들어가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그 당시 개혁을 부르짖은 조광조 일파가 처형되는 기묘사화의 광풍이 일어 퇴계 이황은 그런 사회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1534년 3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1537년 36세 때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상주로서의 도리를 다한 효자였다.

1539년 38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받기도 했다. 사가독서는 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을 말하는데 그의 학문의 깊이와 인품을 짐작하게 한다. 1545년 을사사화로 잠시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있기는 했지만 퇴계 이황은 단양 군수, 풍기 군수, 충청도 어사, 강원도 어사, 성균관 대사성, 판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 여러 벼슬살이를 하면서 백성의 고통과 농촌의 현실을 보고 겪었으며, 철저한 유학 교육을 시켜 관리를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퇴계 이황은 일생 동안 나라에서 140여 회나 내린 벼슬을 79번 사임하고 61번의 벼슬살이를 했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의 길이었다.

퇴계 이황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성리학이 가장 크게 일어날 적에 이의 체계를 세우고 새로운 학설을 덧붙여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겨 집대성한 것이다. 그런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은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면서 결실을 이루게 된다. 사액서원은 임금으로부터 서원 명칭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하사 받는 국가 공인 서원을 말하는데 그의 발의로 이루어진 사액서원은 명문 사학(私學)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경상도 유림 문화의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퇴계 이황은 벼슬을 접고 말년에 고향 안동에 내려와 스스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을 건립하여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현실 생활과 학문 세계를 구분하여 오롯한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나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안동에는 퇴계 이황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 다섯 군데가 있다. 첫 번째는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노송정 종택이다. 1501년 퇴계가 태어난 방을 퇴계태실이라 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두 번째는 퇴계 이황이 강학을 펼쳤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당이다. 도산서당은 도산서원 경내에 자리잡은 건물로 퇴계가 57세의 나이에 짓기 시작해 61세에 완성하였으며, 이곳에서 몸소 거처하면서 타계할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쳤다. 1574년(선조7) 퇴계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이 건립되었으며, 1575년 사액서원이 되어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세 번째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퇴계종택이다. 이 종택은 안채, 사랑채, 사당채로 구성된 전형적인 경북 종갓집의 모양을 하고 있다. 고택 앞으로 토계가 흐르고 뒤편으로 도산이 에워싸고 있다. 네 번째는 퇴계종택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퇴계묘소다. 퇴계는 스스로 묘비명을 지었다. 다섯 번째는 봉화 청량산에 있는 오산당이다. 퇴계는 55살 때 이곳에 머물며 시를 짓기도 했다. 퇴계가 남긴 묘비명에는 평생을 학문에 매진하며 살아온 대학자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가 느껴진다.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아 / 중간에 어쩌다가 학문을 즐겼는데 / 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 더 주어졌네 / 나가서 넘어지고 물러서서는 곧추 감추니 / 나라 은혜 부끄럽고 성현 말씀 두렵구나 /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깊고 또 깊어라 / 관복을 벗어 버려 모든 비방 씻었거니 / 내 마음을 제 모르니 나의 가짐 뉘 즐길까 / 생각컨대 옛사람은 내 마음 이미 알겠거늘 / 뒷날에 오늘 일을 어찌 몰라줄까 보냐 /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 속에 근심 있는 법 / 조화타고 돌아가니 무얼 다시 구하랴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을 남긴 서애 류성룡

나라가 태평할 때보다 어려움에 처할 때는 반드시 훌륭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적 인물이 필요하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이라는 최악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발굴하고 정란에 휩싸인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전심전력한 명 재상이 바로 서애 류성룡이다.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 어머니의 고향인 경북 의성 사촌리에서 태어나 안동 하회마을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를 따라 한양 등지에 머물며 이순신과도 교우를 맺었는데 이 인연은 이순신의 능력과 기개를 알아보고 등용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대업과 이어진다.

20대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매진했다. 책을 읽으면 한 번 스친 글자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정도의 천재적 명석함을 지녔다. 그로 인해 스승인 퇴계도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칭찬했고, 그의 수제자가 될 만큼 높은 학식을 갖추었다. 류성룡은 스승을 따라 재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려 했으나 어버이의 뜻에 따라 벼슬길에 입문하게 된다. 25세가 되던 해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 홍문관, 사간원 등 관직을 두루 거치고 이조·병조·형조의 요직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 중 선조께 시무책을 올리는 등 국난극복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군사 전략에 대한 연구와 군대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화기 연구 제조, 남한산성을 비롯한 산성 구축 등 당면한 난리와 후세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실시했다. 또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손수 지어주고 실전에 활용하도록 했다. 정치적 고난을 겪어 파직된 뒤 향리에서 저술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懲毖錄)’(국보 132호)은 역사적 가치가 높다.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는 류성룡이 후학을 양성하려고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원을 옮겨와 새 이름을 붙인 병산서원이 있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는 병산서원은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명문 서원으로 동재와 서재, 만대루 등 건축물의 조형미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넓은 대지와 강, 바위 벼랑을 아우르는 절묘한 주위 풍광이 아름다워 찾는 이의 발길이 잦다.

◇일제 암흑기에 더욱 빛났던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

치욕의 일제강점기에 총보다 강한 펜으로, 또 온몸으로 독립을 갈구하며 청춘을 불사른 문학인이 여럿 있다. 이른바 민족저항 시인으로 불리는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 안동 출신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 군자금을 전달하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는 등 목숨 건 독립운동을 벌였고, 명징한 언어로 독립 의지를 노래하며 올곧은 삶의 자세를 끝까지 보여준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다.

이육사는 독립운동 기간 동안 17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는데 조선은행 대구지점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 형을 선고 받고 투옥됐을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고, 이것이 평생 그의 이름이 됐다. 일본과 만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는 틈틈이 발표한 그의 작품은 조국 현실의 안타까움과 암흑 속에서 빛나는 별을 찾듯 독립을 갈망하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육사는 독립운동 도중 잠시 귀국해 1926년 ‘문예운동’ 창간호에 시 ‘전시(前時)’를 발표하고, 1930년 ‘대중공론’에 ‘3익(翼) 12방(房)’이라는 시를 선보였고, 1933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44년 일경에 피검되어 머나먼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육사는 강렬한 저항 의지와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시 36편을 남겼다. 안동시 도산면에 이육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그의 절규가 담긴 절명시(絶命詩) ‘광야’를 음미해보자.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월영교의 봄 (2)
국내에서 가장 긴 목책교인 안동 월영교는 계절마다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며 시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한국의 대표 전통민속마을 하회마을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안동 하회마을은 600여 년 간 풍산 류씨 집성촌으로 한국의 전통미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했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최고의 길지로 이름 나 있다.

마을은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458개 동 가운데 125세대 238명이 살고 있는데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보존되어 있고,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선비문화의 전통이 느껴지는 군자마을

안동 와룡면에 위치한 군자마을은 ‘한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김효로, 김연, 김유, 김부필, 김부의 등 조선 시대 학자를 많이 배출한 광산 김씨 예안파 집성촌으로 20여 채의 한옥이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채 멋과 격식을 갖추고 잘 배치되어 있다.

옛 선조들의 이야기와 문화,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군자마을에는 개인 정자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고 있는 탁청정을 비롯해 유물전시관 숭원각에는 선대 유물, 고문서, 서적 수백 점이 전시되어 있다. 선비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고택체험도 가능하다.

△유교문화박물관 &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안동 도산면에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 학문을 집대성하고 연구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이 있다. 이곳에는 특별히 국내 유일의 유교문화박물관이 있어 안동이 유교 전통의 고장임을 잘 보여준다.

유교문화박물관은 지상 4층 전시면적 2,675제곱미터(809평) 규모로 유교와의 만남, 수양, 가족, 사화, 국가, 미래사회라는 주제의 전시를 통해 우리 전통의 핵심인 유교문화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한편 문화유적지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 영상매체를 통해 안동의 독특한 문화를 관람할 수 있는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이 있다. 80석 규모로 이루어진 영상관에서 4D입체영상도 관람할 수 있고 야외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도심 속 자연과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은 안동의 전통문화를 연구, 개발하여 과거의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현한 21세기를 선도하는 박물관으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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