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들 넋 서린 곳, 후손에 역사교육의 장으로”
“독립투사들 넋 서린 곳, 후손에 역사교육의 장으로”
  • 윤부섭
  • 승인 2017.12.2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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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도시 대구의 독립운동가들 <下>
장진홍열사
장진홍 열사

모진 고문에도 단독범행 주장…감방서 순국

장진홍 열사(張鎭弘·1895년 7월 27일~1930년 6월 30일)

1908년 대구부에는 대구감옥이 있었다. 1910년 4월 현재 삼덕교회가 있는 자리로 대구감옥이 옮겨졌고 1923년 대구형무소가 됐다. 조선은행에 폭탄을 던진 장진홍 열사가 순국하고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장의사의 폭탄의거 관련자로 몰려 수감된 곳이다.

“너희들 일본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고야 말겠다.” - 1930년 장진홍 의사, 순국하기 전 옥중에서 조선총독에게 보낸 서한에서

칠곡군에서 태어난 장진홍은 1927년 10월 18일 아침, 조선은행 대구지점 인근의 점원으로 가장, 여관 사환에게 벌꿀선물 상자로 위장한 폭탄을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의 순서대로 급히 배달 해달라고 한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도착한 사환이 벌꿀선물상자를 건네주었지만 일본인 은행원이 다이너마이트가 들어있는 걸 확인하고 은행 밖으로 상자를 버렸다. 하지만 폭탄이 터지면서 은행원, 경찰관 등 5명이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전파됐으며 유리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

장진홍을 놓친 일경은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이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악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때 민족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이 억울하게 옥고를 치렀다.

일본의 동생 집에서 체포된 장진홍의사는 모진 고문에도 이번 사건은 자기 혼자 한 것이라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1930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의사는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은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삼창했다.

1930년 6월, 의사는 일제에 의해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기로 결심하고 대구형무소 감방에서 순국했다. 의사의 나이 35세였다. 그의 시신은 칠곡군 석적면 남률의 한 언덕에 서둘러 매장됐다. 광복되기전에도 그의 무덤 곁을 지나는 행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옷깃을 여며 예를 올렸다고 한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64
경상감영과 북성로 공구골목 사이에 있는 264작은 문학관이 관심부족으로 잊혀지고 있다.

경상감영 인근 ‘264 작은문학관’ 찾는 이 없어

이육사 (李陸史·1904∼1944)

퇴계 이황의 14대손인 육사는 17세인 1920년부터 34세인 1937년까지 대구에 거주했고, 그 후 타계하는 1944년까지는 서울과 만주에 머물렀는데, 이옥비 여사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앞서 장진홍열사의 조선은행 폭탄 사건으로 대구에 있던 많은 불량선인들이 검거돼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육사의 형 이원기가 이때 고문으로 불구가 되어 1942년 세상을 떠났다. 동생 이원록 역시 대구형무소에 갇혔는데 이때 수인번호 264가 그의 필명이 된다.

대구시 중구 경상감영 근처 골목에 ‘264 작은문학관’이 있다.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에 이어 만들어져 ‘작은’ 문학관이 됐다. 경북대 박현수 교수의 사비로 만들어져 지난해 5월 10일(이육사의 생일인 음력 4월 4일) 문을 열었다. 이날 개관식에 이옥비 여사도 참석했다. 옥비(沃非)는 ‘기름지지 말라’ 즉 검소하게 살아라라는 뜻으로 육사가 백일때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264 작은문학관은 처음에는 매주 수·목·금요일 오후와 토·일요일에 문을 열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이가 많지 않아 11월부터 매주 토요일만 문을 열고 있다. 순종어가길에 조성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인 행정기관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렇게 외면받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종암
이종암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단체…정예단원 200명

의열단(義烈團·1919년 11월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 출범이후 해체)과 이종암(李鍾巖·1896∼1930.6.10)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항일 무장단체가 의열단이다. 정예단원이 200명을 넘고 결사대원만 70여명이다. 단장은 김원봉, 부단장 이종암(사진), 김창숙이다. 이종암은 1896년 달성군 공산면 백안동에서 출생해 대구 남산동에서 살았다.

대구은행에 입사해 출납주임이 됐으나 1917년 은행돈 1만 9천원을 갖고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이상룡, 이시영, 김동삼을 만나 독립운동을 하게된다. 3.1운동 후 김원봉과 함께 여운형이 주도하는 구국모험단에 들어갔고 1919년 11월 길림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한다. 1925년 11월 달성군 달서면 노곡리서 체포, 혹독한 고문에도 의열단의 과거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았다. 1930년 6월 옥중 순국. 의열단의 강령을 살펴보면 1.일본 제국주의 타도, 6.언론출판집회결사, 거주의 자유 9.남녀평등 11.소득세 누진율 등으로 지금 봐도 전혀 시대에 뒤쳐지지 않은 진보적인 20조의 강령이 있었다.

의열단이 벌인 거사를 살펴보자.

1920년 9월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 폭탄투척 중상, 박재혁 (부산출신 의열단) 사형언도 1921년 27세때 대구형무소에서 스스로 음식을 끊어 순국.

1920년 12월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최수봉(원명 최경학) 1921년 5월 28세에 대구형무소에서 순국. 이종암이 폭탄 공급.

김상옥(1890.01.05~1923.01.22) 영화 ‘암살’에서 나온 것 처럼 경찰서 폭탄투척 등 잇단 특공투쟁을 한 의열단원. 김상옥은 일본경찰 수백명과 3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인 끝에 남은 한발의 총알로 자결했다.

울진 창유계(暢幽契) 사건

비밀단체 조직 102명…모진 고문에 대다수 절손

1943년 울진군에서 독립투쟁사상 유례가 드문 참혹한 옥사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창유계 사건. 1941년 9월 남원수, 임시헌, 장세전, 주진욱, 윤대규 등이 항일 비밀단체 창유계를 조직한다.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43년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적발돼 102명이 체포됐다. 당시 울진 경찰서장 나까도미가 공명심에 부풀어 잔혹한 전기고문, 물고문, 손톱밑에 침 박기, 남근에 심지박기 등을 자행한다.

이때 6명이 고문으로 사망하고 반죽음이 된 61명이 석방된다. 대구검찰청으로 35명이 송치됐는데 하나오카 검사 역시 공을 세우려고 다시 고문을 해 7명이 사망한다. 남은 28명중 22명이 기소돼 11명이 실형을 받았는데 복역중 3명이 사망해 전체 16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8명이 대구형무소 복역중 해방을 맞아 석방됐지만 걸을수 없을 정도로 몸이 상해 동산병원에 1개월 입원후 겨우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 자식을 둘 수 없어 절손이 된 분이 대다수다.

삼덕교회이전예정지
옛 대구형무소가 자리했던 대구 삼덕교회 이전 예정 부지. 전영호기자 riki17@idaegu.co.kr

의거 표석·독립 열사들 흉상도 찾기 힘들어

“대구형무소를 민족정기 선양의 터로”

1942년 계성학교 학생 15명의 광복투쟁 결사대, 1942년 대구농림학교에서의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의 유혈사태 등 지역의 학생 독립투사 상당수가 젊은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석방되더라도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힘든 생을 보냈다. 대구형무소 자리에는 현재 삼덕교회가 신축공사를 준비하고 있다.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김명환 지부장은 “수십년 전부터 대구 형무소 자리에 표지석이라도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이미 사유지로 돼있어 진척이 되지 않았다. 조양회관이 허물어질 위기에 놓였을때 언론과 시민들이 나서서 이전복원이 이뤄진 것처럼 여론이 뒷받침된다면 대구형무소를 민족정기를 고취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꾸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에는 동산파출소 앞에 3.1 운동 기념 조형물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장진홍 열사의 의거 터를 알리는 표석도 없고 독립 열사들의 흉상도 거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삼덕교회 1층에는 이 곳이 대구형무소 터였음을 알리는 설치물이 있다. 교회측은 신축 교회에 대구형무소 터였음을 알리는 공간을 마련하거나 조형물 설치를 검토했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일제시대 부산, 광주에 고법이 없어 부산에서도 대구로 와서 2심 재판을 했고 그만큼 대구형무소는 많은 애국지사가 옥고를 치렀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로부터 교훈과 비전을 얻고자 하는 다크 투어리즘이 전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다. 광복회 관계자는 “순국선열의 피가 물든 역사의 현장을 우리는 해방이후 70년 가까이 백지처럼 모르고 살아왔다. 일본은 거짓 역사라도 교육하기위해 혈안이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후손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갈수록 어두운 길로 향할 것”이라고 탄식했다. (자료 참조 항일 독립운동사 대구경북편 1991. 정휘창 지음)

김종현기자 oplm@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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