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 귀’ 처럼 아리따운 아씨들, 봄 마중 나왔네
‘노루 귀’ 처럼 아리따운 아씨들, 봄 마중 나왔네
  • 윤주민
  • 승인 2018.02.2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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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휘영의 야생화 편지 (8)노루귀
잔설·언 땅 헤치고 나온다 해서
‘파설초·설할초’라고도 불려
꽃이 지고난 뒤 펼쳐지는 잎 세 장
털이 보송한 모습이 노루 귀와 닮아
2월 말~4월께 전국 각지서 꽃 피워
어린 딸아이의 홀어머니 향한 전설도
분홍노루귀
분홍노루귀

#이제 봄인가 봐요?

차디찬 겨울을 거두어가는 바람결이 감지되면서 마음은 일찌감치 절기를 앞서가고 있었다. 이제 꽃이 피어나리라. 그러면 새로운 꿈도 희망도 기쁨도 함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리라. 그리고 나는 겨우내 먼지 나는 도시를 쓸던 시선들을 뒤로하고 겨울과 작별을 고할 수 있으리라.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부쩍 봄 이야기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이 부드럽게 살랑이기 시작했다. 봄꽃 이야기도 봄나들이 이야기도 나온다. 봄이 오면 꽃을 보리라. 아니 꽃이 피면 봄을 맞으리라 했다. 하지만 벌써 우리의 양지바른 앞뜰에 저만치 봄꽃들이 와있다. 겨울이 채 가시기 전 시린 바람을 맞으며 피는 봄꽃들, 그 봄꽃 삼총사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른 봄 복수초, 변산바람꽃과 함께 ‘노루의 귀’처럼 아리따운 ‘아씨’들이 나를 반긴다. 잔설과 언 땅을 헤치고 나온다고 하여 파설초(破雪草) 혹은 설할초(雪割草)라 부르는 노루귀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잠시 쉬고 나면/ 새 힘을 얻는 것처럼// 겨울 뒤에 오는 봄은/ 깨어남, 일어섬, 움직임의 계절// ‘잠에서 깨어나세요’/ ‘일어나 움직이세요’// 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소녀처럼/ 살짝 다가와// 겨울잠 속에/ 안주하려는 나를/ 흔들어 댄다// (겨울잠을 깨우는 봄/ 이해인)

녹초가 되어버린 소년처럼 겨울잠을 자는 나를 일으켜 깨운다. “봄인가 봐요. 봄이 되려는가 봐요. 겨울동안 눈싸움 한 번도 못하고 살았는데 억울하지만 봄은 역시 좋죠. 봄이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봄이 되면 커피 한 잔을 들고서 동성로를 걸어 보지 않을래? 봄이 되면 나는 금호강변으로 간다, 지천으로 깔린 봄을 줏으러.” 이렇게 노루귀는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그랬다. 겨우내 힘겨웠던 계절을 가끔씩은 나와 세상을 돌아다니느라 분주했었다. 이제 커피 한 잔을 들고 나와 봄을 맞아도 좋으리.

청노루귀
청노루귀

#노루의 귀를 닮은 노루귀

우리 식물명에는 특히 초본성 풀꽃에는 까치, 꿩, 매, 노루, 범 등 동물의 이름이 붙은 것이 많다. 까치수영(염), 꿩의비름, 매발톱, 범의귀 등과 같이 주로 식물의 외형적 특성이나 냄새 등에 견주어 붙여진 것들이다. ‘노루’라는 접두사가 들어간 것으로는 노루귀, 노루오줌, 노루발풀, 노루삼, 노루궁댕이(버섯)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노루귀가 앙증맞은 꽃의 자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노루귀는 꽃이 지고난 뒤 펼쳐지는 세 장의 잎에 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모습이 노루의 귀와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에게는 노루귀처럼 보였지만 이것이 일본에서는 삼각형(三角草), 서구인들에겐 간(Hepatica)의 모양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노루귀는 미나리아재비과 노루귀속의 여러해살이풀로 학명은 Hepatica asiatica Nakai이다. 여기서 헤파티카(Hepatica)는 간장(肝臟)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 헤파티커스(hepaticus)에서 유래한다. 종소명 아시아티카(asiatica)를 보면 주로 아시아지역에 분포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가장 뒤의 나카이(Nakai)는 명명자의 이름이다. 우리의 식물들 중에서 상당히 많은 종의 학명에 나카이, 마키노(Makino) 등의 일본 학자의 이름이 붙거나 종소명에 자포니카(Japonica, 주로 여성명사에 붙으며, 남성명사에는 japonicus, 중성명사에는 japonicum이라는 학명이 붙음)나 자포넨시스(Japonenis)가 들어간 것이 많다. 1900년대 초반에 당시 동경제국대 식물학 교수였던 나카이 다케노신, 마키노 도미타로 등이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식물의 조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처음 학명으로 등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유종에 대개 일본산(Japonica, Japonenis)이라는 종명과 이들 일본 식물학자의 이름이 학명으로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다.

노루귀속에는 우리나라에 3종이 있는데 일반 노루귀와 제주도 등 남해안에 자생하는 새끼노루귀, 울릉도의 섬노루귀 등이 있다. 새끼노루귀는 노루귀에 비해 개체의 크기가 작고 꽃과 잎이 함께 나오며, 울릉도에 자생하는 섬노루귀는 개체가 크고 꽃에 비해 잎이 아주 크고 꽃과 잎이 함께 돋아난 모습에 땅바닥에 붙은 듯한 느낌이든다. 노루귀는 색깔도 흰색, 연분홍색, 붉은색, 자주색 등으로 다양한데, 대개 흰색과 분홍색 계열이 많으며 자주색은 아주 귀하여 청노루귀라고 한다. 노루귀의 꽃말은 ‘인내’, ‘신뢰’ 혹은 ‘자신’, ‘수줍음’ 등이다. 일본에서는 미스미소우(三角草), 중국에서는 장이세신(獐耳細辛), 영어로는 간(liver)과 같은 잎이라 하여 아시안 리버리프(Asian Liverleaf)라고 한다. 2월 말~4월 동안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꽃을 피운다.

붉은노루귀
붉은노루귀

#노루귀 전설

옛날 어느 산골 기슭에 외딴 오두막집이 하나 있었다. 이 오두막집에는 홀어머니와 어린 딸 아이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딸아이가 봄나물을 캐러 혼자서 산중턱까지 올라갔다. 딸아이가 열심히 나물을 캐고 있는데 요란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의 정체는 바로 포악하기로 유명한 그 고을의 원님 일행들이었다. 고을원님은 “산속에 있는 노루며 토끼, 꿩 같은 짐승들을 모조리 잡아가도록 하겠다”라고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딸아이는 짐승들이 걱정되어 “노루야, 토끼야, 꿩아 어서 숨거라”하며 외치고 다녔다. 그런 딸아이의 모습을 본 고을원님은 그녀가 마음에 들어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딸아이는 홀어머니 생각에 끝까지 거절했고, 고을원님과 그 일행은 강제로 그녀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딸아이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엔 흰색의 꽃 한포기가 남아 있었다.

그 꽃에는 노루의 귀처럼 희고 긴 털이 많아 나 있었다. 사람들은 딸아이의 예쁜 마음씨를 생각하며 그 꽃을 ‘노루귀’라고 불렀다 한다. 늦은 저녁 산에 귀 대고 자다// 달빛 숨소리 부서지는/ 골짜기로/ 노루귀꽃 몸을 연다// 작은/ 이 소리// 천둥보다 크게/ 내 귀속을/ 울려// 아아// 산이 깨지고/ 우주가 깨지고// (노루귀꽃 숨소리/ 이성선).

흰노루귀
흰노루귀

#노루귀와의 만남

노루귀를 처음 본 것은 경주 토함산자락의 시부거리에서였다. ‘변산바람꽃’을 만나러 갔었는데 2월 말 늦어도 3월 초에는 가야 할 것을 때를 놓치고 3월도 중순이 다 돼서야 갔다. 때늦은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을 보고 돌아서 오는 길에 경주 토함산을 오르는 비탈길에 만난 꽃이 바로 노루귀였다. 붉은색, 흰색, 연분홍색 꽃들이 찬바람에 하늘하늘거리며 피어 있는 노루귀를 보며 나는 그냥 주저앉아 꽃들과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솜털이 보송보송 난 꽃대가 정말 노루가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듯했다.

처음 본 순간 ‘상큼’, ‘깜찍’, ‘발랄’, ‘환희’, ‘수줍음’ 이런 단어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산비탈에서 그다지 인기척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 그렇다고 아주 깊은 산속도 아닌 곳 그런 곳에 노루귀는 피어 있다. 굳이 절벽 같은 비탈은 아니지만 평지도 아닌 곳 그런 곳이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가까운 습윤한 곳, 멀리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너무 외져서 고독에 쌓이지도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 노루귀는 피어 있다. “나를 불러 주세요”라고 말하듯 하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의 잔잔한 웃음이 사람들의 안부가 반갑지 않던가, 부드러워진 바람결은 더욱더 반갑지 않은가? 이유도 없이 바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바람처럼 가벼이 세상을 나서보고 싶다는 것일 것이다. 애써 머물지 않는 바람. 그 바람결을 타고 이제 세상 밖을 나서보자. 노루귀처럼.”

칼럼니스트 hysong@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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