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책 대신 현금 인출 ‘덜미’…졸지에 범죄자 낙인
C씨는 가족들에게 취업한 것처럼 속이고 모텔을 빌려 합숙하며 퀵으로 받은 대포카드로 하루 4천만원 가량을 인출해 Y씨에게 송금했다.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주말에는 쉴 수 있었다. 올해 여자친구와 결혼 계획도 잡았다.
지난 1일 C씨는 여느때처럼 수성구 범어동의 한 은행 ATM기에서 1천600만원을 인출했다. 수사기관을 사칭하는 보이스피싱에 속아 A(55)씨가 입금한 돈이었다.
C씨는 인출하던 중 붙잡혔고 지난 3월부터 시작된 ‘꿀알바’도 끝났다. 수갑을 찬 C씨를 본 이웃주민들은 평범하고 착한 이웃을 왜 잡아가는지 경찰에게 물었다고 한다.
대구 서부경찰서는 9일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로 3억원 상당을 인출한 국내관리책 등 29명을 검거했다. 이 중 국내관리책 및 인출책 5명을 구속하고 통장을 양도한 2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국내총책 K(36)씨는 중국에 체류 중이다.
경찰에 따르면 인출을 맡은 P씨 등 4명은 일정한 직업을 가져본 적 없고 일상 생활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는 평범한 20~30대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이들은 범행 후 인출금의 1~1.5% 가량을 대가로 받았다. 운전만 해도 하루 30만원은 챙겼다고 한다. 대포통장 양도자들도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 게시판 등에 올려진 통장 1매당 100만~150만원에 산다는 게시글을 보고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양도한 것으로 전국적으로 95매가 매매됐다.
이처럼 간단한 작업만으로 고액을 받을 수 있는 ‘인출책’ 아르바이트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엄연히 불법이지만 인출책들은 단순히 ATM기기에서 돈을 인출해 전달하는 일만 하면 되는 만큼, 본인도 범죄에 가담했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특히 구직이 힘든 청년층들이 돈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실제 온라인 상에는 “아는 형에게 속아 보이스피싱 인출책을 하다 1년 형을 살고 나왔음에도 추가건이 발견돼 아무 일도 못하고 법원에 들락거린다”며 “이 글을 보는 피해자들에게 죄송하다”는 게시글을 종종 볼 수 있다.
서부서 관계자는 “계좌 추적을 통해 지금까지 밝힌 피해액은 3억원이지만 실제 수십억에서 수백억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며 “인출책으로 고용된 이들의 면면을 보면 회사원처럼 일하는 극히 평범한 젊은이가 많다”고 말했다.
정민지기자 jmj@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