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 함께 있되 오롯이 홀로있음
생성, 함께 있되 오롯이 홀로있음
  • 승인 2014.10.2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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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주 미술평론·미학
풀벌레 소리 자욱하다. 아침 공기 차다. 가을이다. 먼발치로 물러선 아침 산등성이와, 색으로 일어나는 잎들을 마주할 때 일어나는 술렁임이 있다. 계절의 변화 앞에서 새롭게 깨어난 감각들은 잰걸음으로 달려온 시간들 앞에 선 우리를 흔든다. 존재를 흔드는 오늘의 여명은 타성에 젖은 삶을 돌이키는 사건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이켜 진리를 직면하지 못하는 일상은 변화를 감지하는 흥분 속에 잠시 몸을 담그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는 경제 원리가 생활 전반으로 확장되면서 현대인의 일상생활이 상품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상품소비를 촉진시키려는 자본 앞에서 수동적이고 소외되어가는 개인은 ‘수동적인 엑스트라’가 되고 일상의 도구나 유행이란 장치 앞에서 통계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자연의 변화가 우리의 감각을 흔들어 일상을 다시 보게 한다면 예술의 변모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기 위해 작동한다. 시각적인 대상을 제작하고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 있던 예술이 삶에 대한 시각을 변경시키는 예술실천으로 나아가게 된 것도 예술 변화의 한 축이다.

커뮤니티아트의 예술가는 예술실천의 핵심을 사람들이 경탄할 만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로운 관점과 명확한 시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 즉 상황을 창출해내는 것으로 파악한다. 커뮤니티아트는 예술이 자본을 상징하는 기호로 기능하는 상황에서 공동체가 직면한 삶의 문제를 다루는 미술이다. 수동적인 자리에서 감상하던 관람자를 예술실천의 참여자로 거듭나게 하는 형식을 통해 과정으로서의 예술은 이미 실천되고 있다. 예술은 더 이상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관람자가 참여하는 가운데 소외에 직면한 공동체의 삶의 문제를 마주한다.

미술기법 중에 콜라주가 있다. 화면에 사진이나 종이, 천 등을 덧붙여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이다. 물감을 혼합하여 채색하기가 각각의 색을 섞어 제삼의 색을 만드는 것이라면 콜라주는 화면을 구성하는 대상물을 중첩시키거나 이웃하게 하는 가운데 미학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콜라주는 각각의 구성 요소들은 그 고유한 언어를 수용하면서 함께 화면을 구성하는데서 오는 긴장이 있다.

산을 물들이는 가을 나무들은 각각이 지닌 본연의 색으로 함께 하기에 어우러짐이 만들어내는 광경으로 탄성을 자아낸다. 하나의 색은 하나의 색이고 그 색들이 함께하는 자리는 그 다름의 충돌이 만들어 내는 미학적 공간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는 “‘따로 함께’의 역설이 실현될 때, 감각의 공동체는 이질성을 이질적인 채로 보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미학에서 성취한 것을 실제 삶에서 이루어내는 공동체를 미학적 공동체라고 부른다. 그것은 공통적인 감정에 의해 형성된 집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미학적 공동체는 공동체의 감각을 형성하는 사물이나 실천들을 같은 의미로 묶어주어 이해가능하게 하는 프레임인 동시에, 그 실천들과 가시성의 형태와 이해가능성이 묶여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절단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학 경험의 평등한 공간은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는 재현 체제와 끊임없이 단절하면서 두 감각 세계 사이의 긴장을 위한 틀을 마련한다. 그것은 함께 있음과 따로 있음 사이의 긴장이며 결합과 분리의 체제를 융합하는 것이다.

예술은 무관심성에 의해 자리하는 고독한 공간을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에 의해 포섭되는 삶을 흔들어 다른 감각을 경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근대의 예술이 추구한 자족적인 세계에 머물 수도 없다. 공동체의 삶의 조건들은 이미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체계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홀로 있음의 극복이 단순히 함께 있음으로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동화되어 한 목소리를 내기를 바라는 일이나 내 목소리만을 내세워 타자를 배제하는 일을 통해 구성되는 공동체는 미학적 공간이 될 수 없다. 기존의 체제가 할당한 자리에서 사물을 감각하는 일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자에 의해 규정된 세계의 수동적인 수용자로서의 나로 머물게 할 뿐이다.

예술이 일상의 감각과 다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을 이끄는 공간을 마련하듯 이질성이 주는 불편함은 기존의 체제에 젖은 자신을 돌아보고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함께하는 삶 속에 개인의 홀로 있음이 오롯이 살아 있는 공간, 그 긴장 속에 또 다른 생성의 시간은 시작된다. 타성에 젖은 삶을 밀어내고 자신의 목소리를 불러내는 공간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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