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죽음을 돌아보는 삶
여기, 죽음을 돌아보는 삶
  • 승인 2015.02.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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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주 미술평론·미학
일상은 반복된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에 안도하며 우리는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다를 것 없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며 벗어나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이 반복적인 일상으로 인해 어김없이 내일이 오리란 것을 확신하게 된다.

‘200개의 캠벨 스프 캔’이 보여주는 반복적인 이미지는 60년대 미국인의, 아니 현대인의 일상을 그린 자화상일지 모른다. 작은 차이를 보이지만 똑 같이 반복되는 일상 말이다. 토마토, 야채, 양파 그리고 또 다시 양파, 토마토, 닭고기, 야채 등등. 똑같은 캠벨 스프의 상표에, 똑같은 디자인으로 끝없이 늘어선 캔으로 남은 하루하루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그리고 반복이 가져다주는 착시 현상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망각하게 한다.

팝아트 미술가 앤디워홀의 ‘캠벨 스프 캔’은 실크 스크린 방식으로 제작됐다. 실크 스크린은 색깔만 다르게 해 반복적으로 같은 이미지를 얻어낼 수 있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캔을 반복 나열해 놓은 화면 처리 방식처럼 실크스크린을 통해 제작된 화면은 반복 재생될 수 있다. 워홀은 말한다. 똑같은 것을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의미는 더 사라지게 되고, 기분은 점점 더 좋아지고 멍해진다. 반복 속에 텅 빈 이미지로 떠돌며 우리의 삶도 영원에 대한 환상에 그렇게 젖어들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다시 말해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삶의 유한성을 떠올리게 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죽음을 상기시키는 메멘토 모리의 도상은 처음에는 죽음 이후를 준비하라 혹은 기독교적 가치에 따른 삶에 매진하라는 종교적 교훈을 담고 있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죽음의 상징으로서의 메멘토 모리는 바니타스(Vanitas), 즉 삶의 유한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향한다. 바니타스는 정물화의 하위 장르이다. 그것은 비눗방울, 모래시계, 해골 등의 상징적인 오브제들을 통해 세속적 쾌락과 성취와 함께 이 모든 것들이 불가피하게 상실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삶이 지닌 근본적인 갈등을 다루고 있는 그림을 의미한다. 바니타스에서의 죽음의 사유는 삶의 소중함과 무의미함을 동시에 전해주는 복합적인 모습을 띤다. 이제 죽음은 외부로부터의 재앙이 아니라 연약하고 공허한 존재의 내적 일부가 된다.

워홀의 ‘캠벨 스프 캔’에서 메멘토 모리나 바니타스의 주제를 찾는다면 바니타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접근법은 유한한 삶의 갈등이나 종교적 교훈을 상징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있지 않다. 또한 그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반복의 기법과 형식을 통해 텅 빈 현실의 삶을 드러낸다. 워홀 스스로가 기계이기를 원했고 20년 동안 똑같은 점심만을 먹었다는 진술을 토대로 미술비평가 할 포스터는 워홀이 대량생산과 소비사회 속에 작동하는 반복에 대한 강박을 포용한다고 보았다. 그는 강박을 깨부술 수 없을 때 그것에 참여하는 전략적 허무주의를 워홀이 애매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워홀의 작품이 지시적인 깊이와 주관적 내면을 희생하고 피상성에 머물러 있다고 보기도 하고 냉엄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워홀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죽음의 이미지는 조금씩 다르게 반복될 수 있을 뿐인 ‘차이와 반복’으로서의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늘어놓은 스프 캔이 삶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삶의 반복이 동요할 때 죽음은 우리 곁으로 문득 다가온다. 삶에 대한 사유는 죽음과 맞닿아 있다.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잃었을 때,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삶의 갈피를 놓치고 부대낄 때 우리는 삶을 돌이켜 보게 된다. 일상이 흔들리는 사태에 직면해서 삶이 서 있는 곳을 보고, 삶이 향해 있는 곳을 보게 된다. 워홀의 스프 캔은 그 어떤 드라마틱함도 없는 기계적인 반복 속에서 느껴지는 삶의 텅 빔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전광판에 기록되는 사망자의 수로, 매체가 쏟아내는 이미지로 일상에 밀려들어온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삶의 한 부분으로 스쳐지나간다. 추상화되거나 이미지화된 죽음이 삶에 더 이상 성찰의 무게를 더하지 못하고 떠돈다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죽음과 함께 있고 삶에 대한 사유는 죽음에 대한 사유를 배제할 수 없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에 장미가 죽었다. 어린 왕자는 장미의 무덤을 껴안았다. 소혹성 B612호는 잠깐 자전을 멈추었다’고 노래하는 시인의 노래에서와 같이 누군가의 삶이 또 누군가의 죽음이, 나의 삶이 또 나의 죽음이 지구를 멈추게 하는 일은 과학의 세계에는 없다. 하지만 ‘장미의 죽음’을 노래한 시인의 세계에는 존재가 존재에게 보내는 포옹에 혹성이 자전을 멈춘다. 허상으로서의 삶이 현실이고 그 표면 뒤에 아무것도 없다하더라도 죽음 앞에 놓인 유한한 삶은 또 그러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보듬는 삶의 의미를 떠올려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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