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친구야
  • 승인 2015.04.26 13: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시종 시인
이렇게 밝고 환한 꽃피는 봄날에, 지옥을 향해 추락해 가는 냄새나는 정치이야기는 접어두고, 오랜 세월에도 때묻지 않은 내 인생의 봄날로 돌아가 보련다.

초·중·고시절 친구 중에 같은 동네 이웃에 살던 초등학교 동네 또래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영원한 것 같다. 성철이는 필자와 같은 점촌초등학교를 나녔다. 우리 학년은 한 반 밖에 없어 5년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성철이는 집도 잘 살고 공부도 뛰어나고 부모님들의 교육열이 높아, 1950년대 초에 담임교사를 가정으로 초청하여 식사대접까지 했다.

필자가 성철이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것은 5학년 2학기 가을이었다. 그때 6·25사변으로 교실이 모자라던 아동들이 점촌서당 터 숲속에서 칠판을 소나무에 기대놓고 종일 공부를 했다. 당시 우리반 담임선생은 이승희 선생님으로 안동사범학교 본과를 졸업한 우수교사였다. 성철이는 공부뿐 아니라 노래도 썩 잘 불렀다. 일류 가수마냥 목청 떨림(바이브레이션)이 일품이었다. 성철이가 전학 가기 전 6학년 2학기 달 밝은 가을밤에 우리집에 놀러와 부른 ‘선죽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는 노랜데, 아직도 필자의 가슴에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6학년 때 담임선생은 김종태 선생님. 충주농업고등학교를 나오신 중학교 입시지도의 베테랑으로, 신설학교였던 점촌초등이 1954년 문경중학교 신입생 입학고사에서 문경군내 40개 초등학교 가운데 합격률이 최고였다. 점촌초등은 이춘식 군이 합격자 240명 중 차석(2등)으로 합격했고, 42명이 지원하여 27명이나 합격하는 최고의 합격률을 기록했다.

성철이는 6학년 2학기 때(10월) 대구 칠성초등학교로 전학하여 대구 계성중학교를 거쳐 계성고, 경북대 화공과를 졸업하여 어려서 부터의 총명이 잘 지켜졌다.성철네 아버지 박억조씨는 이름이 재미있어, 성철이 친구 개구쟁이 입에 오르내려 70대 중반의 필자도 지금껏 성철이 아버님의 존함을 잊지 않고 있다.

성철네 집은 중신기 신작로(도로)옆이었다. 아버지가 운전수라서 길가 집을 선택한 것 같다. 1950년대 초엔 자동차가 희귀하여 화물차(트럭)가 문경군을 통틀어 3대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도락구(트럭) 삼총사’라 이름을 붙이고, 오늘날의 조종사보다 당시 더 희소가치를 지닌 문경의 운수업 선구자를 소개 드린다. 박억조씨( 박성철 부친), 김두경씨(김지훈 부친), 전태억씨(전규홍 부친)이 그분들이다.

1949년 7월16일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노루목고개 공비피습사건 때, 문경경찰서 병력을 수송한 것은 문경석회주식회사(현 점촌문화사 자리) 차와 운전사였다. 1950년대 트럭 운전사는 문경군내 다섯 손가락도 안될 정도로 희소가치가 대단했다. 운전할 때도 로마이(양복) 정장을 하고 운전석 옆에는 마나라이(조수)가 배석하고 있었다.

김장철이 되면 성철네 집은 마을사람들의 시선과 부러움이 집중했다. 통이 굵은 청국배추를 절여 김장독 여러개를 꽉 채웠다. 딴집들은 손가락 같이 가는 여윈 조선배추를 양념도 없이 소금물에 절였다. 다른 집들은 빈약한 조선배추 짠지(김장)도 엄력설 전에 동이나, 콩잎이나 팥잎이 밥상에 오를 무렵 성철네 집에는 살찐 창국배추김치가 봄철까지 밥상을 떠날 줄 몰랐다. 성철네 어머니가 그 때 배추김치 한포기를 주셨다. 지금까지 먹어본 김치 맛 중 성철네 김치를 앞서는 김치를 못 만났다.

성철네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연세(나이)가 같다고 ‘동갑네’라며 친구로 여겼다. 성철이만 내친구가 아니라 성철이 어머니도 우리 엄마의 친구였다. 내친구 성철이는 형제가 3남3녀였다. 박금련(여), 성철(남), 청자(여), 성련(남), 성호(남), 피란(여·사변동이)이다. 성철이 부모님은 금슬도 좋았고, 자녀들도 다들 똑똑하고 착했다.

성철이는 인성도 착하고 두뇌도 총명하여 언젠가 큰 바위 얼굴이 되어 죽마고우인 필자 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했지만 끝내 그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비교적 집념이 강한 필자는 친구 성철이를 잊을 수 없었다. 1994년경 여름 필자 나이도 쉰둘을 헤아릴 무렵(풍양고 교감재직) 성철이 부친 존함이 문득 떠올라 114에 박억조 어르신의 전화번호를 물어 알아 냈다. 필자는 반갑게 성철이 부친께 전화를 올렸지만, 40년이란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며 성철이 근황을 숨기시고 알려주지 않으셨다. 세상의 불신이 얼마나 깊었으면 필자의 진실이 외면당했을까. 그러구러 십년이 흘렀지만, 필자는 친구 성철의 근황이 여전히 궁금하여 성철 누님(금련씨)의 전화번호를 추적하여 성철이 매형과 통화를 해보니, 성철 모친과 부친은 다 돌아가셨고, 성철은 불치병으로 와병 중인데, 그 자제가 전문의로서 촉망을 받고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다.

성철이가 점촌초등 6학년 때 대구로 전학을 가서, 우정으론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가 전학감으로 필자가 점촌초등 2회 졸업식 때 우등상을 탈 수 있었다.

성철이는 필자에게 우등상이란 큰 선물을 주고 떠난 것이다. 성철씨! 그대는 이승에 있던 저승에 있던 영원한 나의 벗이로소이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