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이용재 “운명적 끌림은 삶이 되었고 치열한 현실은 예술이 되었다”
조각가 이용재 “운명적 끌림은 삶이 되었고 치열한 현실은 예술이 되었다”
  • 곽동훈
  • 승인 2015.05.0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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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계가 주목

힘든 예술가 삶 포기하는 후배들

잡지 못하는 자괴감, 작품에 이입

스승 이점원 교수에 성실함 배워

많은 작업량, 지금의 나를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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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作 ‘눈물’. (가변설치·합성수지·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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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작가가 웃는얼굴아트센터 두류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 ‘누하’를 설명하고 있다.

“남자가 미술을 한다? 그럼 당연히 조각 정도는 해야지.”

미술대를 가고 싶었던 청년이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 청년은 미대를 가고 싶어 화실을 하는 한 선배를 찾아 조언을 구할 요량이었다. 그 선배로부터 들은 말은 저것이었다. “남자가 태어나 미술을 한다면 당연히 조각 정도는 해야지.”

청년은 그 길로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뒤 조각을 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계가 주목하는 조각가 이용재(50) 작가. 이 작가가 조각의 길에 들어서게 된 이유가 선배의 저 말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라고는 또 부인 못한다. 정작 본인조차도. 아마 운명의 끌림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 운명의 끌림, 그건 그 자체로 그의 삶이 됐다.

대구 재단법인 달서문화재단 출범 1주년을 기념해 대구문화예술회관과 달서구 웃는얼굴아트센터에서 특별전을 열고 있는 그를 지난 25일 웃는얼굴아트센터 두류갤러리에서 만났다.

두류갤러리 실내. 그의 작품 30여점이 전시 중이었다. 이번 특별전에서 그의 대표 작품인 ‘누와’(淚河) 앞에서 대뜸 물었다.

“실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서비스직에 종사는 여성들이 많이 하는 머리망을 닮았습니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술적 지식의 일천함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이 작가는 호탕한 목소리로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작품 이름인 누하는 ‘몹시 흐르는 눈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보통 ‘한없이 울었다’, ‘한없이 흐느꼈다’는 등의 표현을 종종 쓰잖아요. 그 때 흐르는 눈물을 일컫는 표현인데, 제 작품에선 이 눈물이 개인의 눈물일 수도 있고, 사회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작업을 했지만 저 역시도 정의를 잘 내리지 못하는데...(웃음). 결국 감정 없는 단단한 사회구조와 이런 사회의 일상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허무한 감정을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 모습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운명과도 같은 조각가의 삶

이 작가는 당초 대학에서 디자인과 공예를 전공했다. 디자인·공예를 전공하면서도 조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군대를 다녀온 뒤 1987년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동국대 예술대학, 전공은 당연히 조각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운명의 은사를 만나게 된다. 경주 동국대 미술학과 이점원 교수다. 이 교수는 1988년 동국대 미술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 후학 양성과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조각가다. 현재까지 개인·단체전을 비롯해 총 400여회의 전시전을 열었으며, ‘오늘의 미술가상’, ‘삼일문화대상 특별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 작가에게 이 교수는 어떤 은사였을까.

“한마디로 조각가 이용재를 키운 선생이다. 교수님 수하에서 조각을 배웠고, 제가 강의 활동을 하는데도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 이점원 교수님이시다.”

느낌이 왔다. 조각가 이용재의 삶에 뭔가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준 인물 같다고 할까.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조각가 이용재에게 예술철학을 심어준 그런 은사였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에게로부터 전수 받은 조각가 이용재의 예술철학이 궁금하다.”

이 질문에 이 작가는 머뭇거렸다. 작품 설명을 할 때 예의 그 호탕하고 웃음기 있는 목소리톤이 아니었다.

“예술철학…. (웃음) 요즘 능력 있고 소질이 뛰어난 예술 하는 젊은 친구들은 미술은 뭐다, 조각은 뭐다, 이런 말을 아주 잘하던데 철학적으로 제 예술을 정의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 더 많은 작업을 한 뒤에야 조심스레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뭔가 은사로부터 뭔가 배운 게 있지 않은가?” 채근성 질문을 덧붙였다.

그제야 이 작가는 “이점원 은사께서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며 “‘너는 조각을 하려면 공무원처럼 해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오전 일찍부터 오후 늦게까지 작업을 해라는 당부였다. ‘작품에 투자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야만 네가 훗날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는 취지의 말씀이셨다”고 했다.

미술 분야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 사실 낮 작업은 우스갯소리로 ‘금기시(?)되는 것’으로 치부될 만큼 꺼리는 것이다. 낮엔 자고 밤에 작업을 해야 집중이 잘된다는 이유에서다. 이 작가는 “선생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난 뒤 지금도 오전 9시가 약간 넘으면 작업을 시작한다. 그에 따른 방대한 작업량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고 했다.

◇잊지 못하는 첫 작품 ‘tears’

이 작가의 첫 개인전은 좀 늦은 감이 있다. 1997년 경기도 안성에 작업실을 얻은 뒤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2008년 ‘tears’(눈물)라는 주제로 서울 관훈갤러리에서 개최한 전시회가 그의 첫 개인전이었다.

또 ‘눈물’이었다. 도대체 왜?

“인생을 살아온 게 아름답지 못한 것 같다. 개인전 역시 더 빨리 열 수 있었는데 일하고 먹고 사는 문제가 있으니 그러지 못했다. 사실 조각하는 친구들이 40대를 전후해 거의 그만 두게 된다. 성공과 실패, 그 여부에 따라 결혼하게 되고 세파에 밀리고…. 그래서 주변에서도 조각하는 선후배들이 많이 없어지는 상황이다.”

이 작가는 고민에 빠졌다. 제자와 후배들이 “선생님 저 그만두겠습니다”하면서 조각을 놓아버리는 상황. 치열함도 없이 미대에 들어가는 세태. 이 같은 아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상황에서 좌절하는 조각가들의 눈물을 대변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에 빠졌다. 결론은 ‘장미의 눈물’이었다.

“정말 확실하게 보여주자, 그 같은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첫 개인전 대표작품으로 ‘tears’라는 장미꽃을 조각했다. 흙으로 만들면 빨리 끝낼 수 있는데 혼자서 직조 방식으로 다 갈아내면서 작업한 작품이다. 꼬박 8개월이 걸렸다. 지금 같아선 어떻게 했나 싶다. 결국 눈물, tears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내가 흘린 땀과 눈물, 떠나가는 친구들을 잡지 못한 자괴감 등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tears를 뒤로 하고 이 작가는 2011년부터는 영국의 시인 존 던의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영감을 얻어 ‘표류-대화’라는 주제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앞으로는 현재 대구에서 전시 중인 ‘누하’ 시리즈에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작가의 양심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월이 되면 서울로 가 또 다른 작업을 할 예정이다. 어떤 작품이 나올 지는 저 역시 모르지만, 그 작품 역시 대구에서 전시하고 싶다. 사실 처가가 대구에 있다.”(웃음) 조각가 이용재, 그는 오늘도 자신의 삶을 조각한다.

남승렬기자 pdnamsy@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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