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 조선’을 ‘헤븐 코리아’로 만들려면…
‘헬 조선’을 ‘헤븐 코리아’로 만들려면…
  • 승인 2015.08.2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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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창 명예 주필
‘죽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헬 조선’이란 사이트의 대문에 나붙은 글귀다. 섬뜩하다.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항거하던 운동권에서 죽창을 들자고 한 적은 있지만 21C 대명천지에 다시 죽창 얘기가 등장할 줄 미처 몰랐다.

‘헬 조선’은 지옥을 뜻하는 영문 ‘헬(hell)’에 한국을 비하하는 의미로 전근대 왕조의 이름인 ‘조선(朝鮮)’을 합친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땅이 지옥이란 뜻이다. 인터넷 사이트 ‘디시 인사이드’의 역사갤러리에서 이 말이 처음 등장했단다. ‘헬 조선’과 더불어 ‘지옥불반도’란 말도 유사어로 사용된다. 이밖에 ‘망한민국’, ‘개한민국’, ‘김치스탄’, 메르스(MERS) 사태를 빗댄 ‘동방전염병지국’이란 말도 간혹 등장한다.

이 말들에서 체념을 넘어선 분노가 느껴진다. 일상화된 권력층의 부정비리, 꽉 조인 신분계층체계, 노력이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회체제에 대한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가 됐다. 이어 취업과 주택구입을 포기하는 5포, 인간관계와 희망도 포기하는 7포를 넘어 이젠 모든 것을 포기하는 ‘N포 세대’란 말까지 나왔다. 포기도 사치란 주장도 나왔다. 포기하려면 기회라도 있어야 하는데 지금 청년들은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란 것이다.

“사회 모순을 지적하면 빨갱이·패배자가 되는 나라, 젊은이가 아프면 청춘이 되는 나라, 의무는 산더미인데 권리는 없는 나라. 네가 고생하는 이유는 노력하지 않아서이고, 대학에 못 간 이유도 취직을 못하는 이유도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전부 틀린 말이다. 지금 젊은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발버둥 치며 노력하고 있다” ‘헬 조선’ 사이트 운영자의 말이다.

헬조선 사이트만이 아니다. 요즘 SNS에는 한 서울대생이 5년 전인 2010년 3월 ‘대한민국의 미래는 필리핀이다’는 제목으로 쓴 글이 돌고 있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한 필자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상위 1%안에 들지 못하면 이른바 SKY대학을 졸업해도 감정노동을 하는 노예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대다수 청년들은 취업난에 시달리다 연예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경제의 선순환 구조도 무너질 것으로 내다봤다. 글을 읽은 사람들은 “무섭다. 어쩜 이렇게 딱 들어맞지. 왜 글을 읽는데 눈물이 나지? 과연 헬조선, 지옥불반도네. 한국을 떠나고 싶다”며 공감했다.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들이 다소 거침없이 표현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단순한 반항이나 불만의 수준을 넘어선다. ‘헬 조선’이 저항의 상징이자 빈자의 무기인 죽창을 내세운 것도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서로를 찌르고 같이 죽자는 자포자기 심정을 표현한 것이란다. 더욱이 기성세대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대목에선 사회나 국가, 기성세대를 향한 적대감까지 드러난다.

특히 최근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국회의원들의 자녀 취업청탁 의혹 등은 ‘헬조선 세대’의 절망감에 부채질을 한 꼴이 됐다. 여기서 ‘헬조선에선 부모를 잘 만나야만 성공한다.’는 이른바 ‘수저론(論)’이 나왔다. ‘헬 조선’사이트에선 부모의 재력과 권력에 따라 금수저-은수저-동수저-흙수저-똥수저 순으로 계급을 분류한다. 최근 ‘베테랑’이란 영화가 흥행가도를 달리는 것도 재벌 등 ‘금수저’들의 행태에 대한 분노와 격한 공감 때문이란 분석이다.

한반도를 생지옥, 불지옥으로 표현하는 ‘헬조선 세대’에게 기성세대들은 할 말이 없을까.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 최저 수준의 출산율, 일상화한 청년실업,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부조리한 현실은 사실이긴 하나 진짜 고통, 어려움을 제대로 겪어보지 않은 나약한 세대들의 투정에 불과하다.” “젊은이들이 시간을 들여 뭔가를 얻으려 하지 않고 지름길만 가려다가 포기하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 일본 유럽은 물론 대만 등에서도 청년 실업은 심각한 사회문제란 점에서 기성세대의 주장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렇다 해도 기성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지옥’이란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철학자 김원식은 ‘배제, 무시, 물화’란 책에서 한국사회의 갈등을 ‘경제적 배제’, ‘문화적 무시’, ‘삶의 물화’ 세 가지 시선을 통해 바라보았다. 배제는 만성화된 대량 실업과 새로운 극빈층의 출현을 낳았고, 외모와 경제력, 학벌 등에 의해 발생하는 무시는 양극화를 발생시켜 오히려 배제보다 더 큰 문제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 배제와 문화적인 무시로 인해 사람들의 삶은 점점 ‘물화(物化)’ 되었다. 인간관계를 포함한 모든 것이 단지 생존을 위한 도구가 돼버리는 세상인 것이다.

김원식은 구조적 갈등과 병리 현상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제도와 역량이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김 씨의 견해는 일견 타당하나 구체적이지 못하다.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있다. 국민 개개인이 진정 주인이 되는 ‘지방분권개헌’이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도 투표를 이기지 못했다. 투표에 이겼으나 선거만 끝나면 정치인을 욕해야 했다. 제도를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도를 바꾸는 분권개헌 없이는 민주주의는 오아시스에 불과하다.

김원식은 구조적 갈등과 병리 현상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제도와 역량이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김 씨의 견해는 일견 타당하나 구체적이지 못하다.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있다. 국민 개개인이 진정 주인이 되는 ‘지방분권개헌’이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도 투표를 이기지 못했다. 투표에 이겼으나 선거만 끝나면 정치인을 욕해야 했다. 제도를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도를 바꾸는 분권개헌 없이는 민주주의는 오아시스에 불과하다.

‘헬조선 세대’는 ‘탈(脫) 조선(해외이민)’을 꿈꿀 게 아니라, 죽창을 들고 절망만 할 게 아니라 헌법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헬 조선’을 ‘헤븐 코리아(Heaven Korea: 천국 한국)’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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