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500년 숨결 선비의 고장…청암정 오르면 저마다 시인묵객
<봉화> 500년 숨결 선비의 고장…청암정 오르면 저마다 시인묵객
  • 김지홍
  • 승인 2016.08.29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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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닭실마을

유학자 권벌 시조 안동 권씨 집성촌

택리지 이중환이 꼽은 3남 4대 길지

대과거 시험 합격자 75명 최다 배출

보물·유물 1만점 소장 ‘충재 박물관’

마을 역사 지킨 ‘청암정·석천정’

송림·계류·수석 등 수려한 경관 자랑
/news/photo/first/201608/img_207212_1.jpg"닭실마을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경북 봉화 ‘닭실마을’은 조선 중기 문신인 충재 권벌 선생을 시조로 한다. 금닭이 알을 품는 ‘금계포란형’ 지세로, 택리지가 말하는 조선 4대 길지 중 하나로 꼽힌다. 동산 기슭에 자리잡은 수십채의 한옥 기와집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경북 봉화읍 문수로를 따라 1㎞ 남짓 가면 낮은 구름 속에 잠긴 마을이 풍경화처럼 눈에 들어온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동산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십 채의 한옥 기와집이 정겹다. 마을 앞을 흐르는 맑은 내와 넓게 펼쳐진 들판이 아늑하다.

이 마을은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닭실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속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34가구가 살고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마을을 안고 있는 산세가, 금닭이 알을 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닭실마을을 경주 양동마을와 안동 내앞(川前)마을, 풍산 하회마을과 더불어 3남 4대 길지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실제로 이 마을에선 조선 중기 때 치러진 대과거 시험에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75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이 명당에 닭실마을이 형성된 것은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에 종택이 있는 충재 종가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권벌은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몸소 체험한 변혁의 시대를 살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은 강직하고 의로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결국 파직 당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권벌은 평생 관직 이동만 63번을 당했다. 권벌이 이 마을을 발견하게 된 계기도 42세 때인 1519년(중종14년) 2월 예조참판이 됐으나 사화를 앞두고 삼척부사로 옮겨가면서다.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을 지나가며 “후손이 살 곳”이라 정했다고 한다.

권벌 종택은 뒷산의 오른쪽 줄기인 마을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백설령의 암탉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전면에 논이 있고 논길을 따라 좌우 세칸의 문간채를 거느린 솟을대문이 서 있다.

1526년 봄, 권벌은 큰아들 권동보와 함께 자신의 집 서쪽에 3칸 독서당인 충재를 짓고 다시 그 서쪽으로 8칸 정자를 바위 위에 지었다.

권벌은 땅 위에 솟아있는 커다랗고 넙적한 거북바위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 거북바위 위에 지어진 정자가 ‘청암정(靑巖亭·명승 제60호)’이다. 닭실마을의 중심이자 정체성을 상징한다. 바위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주춧돌과 기둥의 높낮이를 조정해 지은 것이 특징이다. 마당에서 정자까지는 돌다리를 걸쳐놓았다. 권벌은 충재에서 면학하다 머리를 식히고 풍류를 즐기며 시를 읊고 싶으면 자리를 옮겨 정자로 올랐다. 정자는 느티나무와 소나무·향나무·철쭉·국화가 어우러져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정자의 천장가구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백담(栢潭) 구봉령과 번암(樊庵) 채제공의 글이 있다. 관원(灌園) 박계현 등 당대 명현들의 글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 그 중에서도 남명(南冥) 조식이 쓴 것으로 전하는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 눈에 띈다.

애초 청암정 주변에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 권벌이 한동안 정자에서 밤새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한 스님의 ‘물이 없어 거북이가 뜨거워 울고 있다’는 조언을 듣고 물을 흐르게 하니 깊은 잠을 자게 됐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닭실마을에서 0.5㎞ 떨어진 석천계곡(石泉溪谷·명승 제60호)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오랜 시간 물에 깎여 다양한 모양으로 형태를 갖춘 바위들이 많다.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응방산과 옥적봉을 지나 유곡리에 이르러 발달한 계곡이다. 나지막한 산세 때문에 골이 깊지 않고 폭이 넓으며 계곡물 또한 깊지 않아 여름철에는 가족 단위 피서객들로 북적인다.

울창한 소나무 숲 속의 한켠에는 권벌의 큰아들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石泉亭)이 세워져 있다. 정자의 난간에 기대 계곡을 바라보면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삶을 꿈꿀 수 있다. 권동보는 이곳에서 ‘제석천정사’라는 시를 썼다. ‘작은 가마가 지날 수 있는 시내 가 길가에 / 글 읽는 정사(精舍)가 물과 구름 사이에 보이네 / 깊은 가을밤에 내린 비바람과 / 뿌연 서리에 시월의 공기 차갑구나 / … ’

우리나라에 지어진 지 450년이 넘은 정자로는 유일하게 청암정과 석천정이 있다. 문화재청은 청암정과 석천계곡을 두고 울창한 송림(松林)과 계류(溪流), 아름다운 수석(水石) 등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명승지로 평가한다.

닭실마을의 ‘충재박물관’은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보물 482점을 포함해 총 1만여점의 유물이 소장돼있다. 권벌의 친필 일기가 기록된 ‘권벌 충재일기’(보물 제261호), 권벌이 애독했던 성리학의 독복 ‘근사록’(보물 제262호), 과거시험 합격 답안 등이 포함된 ‘권벌 종가 전적’(보물 896호), 권벌의 모친 윤씨가 친정으로부터 받은 재산 상속 문서인 ‘분재기’(보물 제910호) 등이 있다.

/news/photo/first/201608/img_207212_1.jpg"청암정/news/photo/first/201608/img_207212_1.jpg"
거북바위에 지어진 정자 ‘청암정’.

◇ 우리 마을은…

“청암정의 시원하고 품격있는 현판들만 해도 엄청난 위상을 보여주고 있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죠.”

봉화군에서 8년째 관광객에게 봉화군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권율(사진) 경북봉화군문화해설사 회장은 청암정을 소개하면서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는 “청암정과 석천계곡은 드라마 등 방송사에서 대표적인 촬영지로 꼽히고 있어요. 계절마다 바뀌는 그 절경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전국에는 760개의 정자가 있는데, 봉화군에만 130여개가 모여있다. 그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가 있고, 가장 오래된 정자가 있는 곳은 봉화군”이라며 “정자가 많다는 것은 선비가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깊은 역사가 숨쉬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봉화군 닭실마을은 지난 한 해 동안 54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최근 마을이 유명해지면서 걱정거리도 생겼다. 여름철이면 발디딜 틈이 없을만큼 관광객들로 빼곡히 가득 차는 석천계곡 주변에서 음식을 조리하거나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개방했던 석청정사도 낙서가 많아지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자, 한동안 문을 닫아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주차료 등도 받지 않고 오롯히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개방하고 있으나, 훼손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news/photo/first/201608/img_207212_1.jpg"봉화닭실한과/news/photo/first/201608/img_207212_1.jpg"
마을의 특산물인 ‘닭실한과’가 만들어지는 과정.

◇ 가볼 만한 곳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봉화장은 2·7일장(매월 2·7·12·17·22일, 봉화읍 포저리)으로 열린다. 예전 행정구역이었던 내성면에 있다해서 ‘내성장’이라 불렸다. 한때 경기가 좋았던 내성장은 영월과 삼척, 울진, 안동, 예천에서까지 장을 보러온다는 의미에서 ‘들락날락 내성장’이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근엔 시장 현대화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11년 문화와 예술을 접목한 ‘봉화장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진행, 민속품을 경매하는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펼쳐왔다. 7일과 17일 27일은 악기와 춤, 노래 등 공연도 한다.

봉화의 특산물은 500여년 전 안동 권씨 종가에서 관혼상제에서 사용한 봉화 전통 한과 ‘닭실한과’다. 유과, 입과, 전과 3가지 종류를 전국적으로 주문 판매하고 있다.한과는 찹쌀 반죽에 멥쌀가루를 입혀 튀겨 조청을 바른 뒤에 강정, 튀밥, 깨 등을 박아 만든다. 국내산 재료만을 써서 전통 그대로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봉화군 유곡1리 1016번지 054-674-0788 / 010-3498-3017.

글=김지홍·김교윤기자

사진=전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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