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편지
아버지의 손편지
  • 승인 2018.03.12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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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주부)


딸은 유치원 때 글씨를 알게 된 이후 연필로 삐뚤빼뚤하게 편지를 써 보냈다. 주로 ‘엄마, 사랑해!’였다. 색종이에 적어서 종이접기해서 보낸 편지를 받고 뭉클하고 사랑이 솟아났던 것이 기억난다. 나이가 들면 엄마에게 편지도 쓰지 않고, ‘사랑해’라는 말도 하지 않을지도 몰라, 소중한 편지를 버리지 않고, 파일에 모아두었다.

중학교 사춘기를 겪으면서 편지구경을 못했는데, 작년 생일날 편지를 보내왔고 며칠 전 친구에게 쓰려고 산 편지지에 사랑이 가득 담긴 손편지를 써주었다. 가방에 넣어다니다가, 힘들면 꺼내보란다. 엄마를 이렇게 좋아해주는 딸이 있어 홍희는 행복하고 고맙다.

아주 오래 전 홍희가 중학생이었을 때가 떠올랐다. 중학생이 되면서 홍희는 엄마가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굴을 뵌 적이 없는 외할아버지는 딸이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도 보내주지 않았다 한다. 홍희는 중학생이 되어 영어도 배우고 지적인 관심도 생겨나 도서관에서 철학서적류나 명상록을 빌려 읽기도 하고, 외국고전을 읽기도 했다. 그래서 글자를 모르는 엄마가 불쌍해 보였다. 세상에는 글자로 이루어진 것들이 무수히 많고, 글자를 모른다는 것은 세상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희는 한글을 엄마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요즘 유치원생도 거의 다 아는 글자를 당시 40대였던 엄마가 배우면 금방 알터였다. 자음, 모음과 글자를 이루는 원리만 알면 되기에 “엄마, 글자 배우기 쉽다. 내가 가르쳐줄게”했다.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일하기도 바쁜데, 글자 배울 틈이 어딨노? 그라고 이제 배워서 뭐하노?”였고 홍희는 입을 다물었다.

대구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큰오빠가 군대를 갔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큰오빠가 보낸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를 들고 면회를 갔다왔다. 강원도 어디라고, 휴전선 근방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장남인 큰오빠를 멀리 두고 온 것이 마음에 쓰이는지, 편지를 써서 홍희에게 학교가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부치라고 주었다.

홍희는 아버지가 주신 편지를 읽어보았다. 평소에 아랫방에 동네어른들이 모여서 정치얘기, 세상얘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면 신문도 없는 시골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싶을 만큼 아는 게 많았다. 농사를 짓기보단 공부를 더해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던 아버지다. 아버지의 편지에는 큰오빠를 걱정하는 마음과 격려가 가득할 터였다. 큰오빠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뿌듯해하며 감격할까 하는 상상을 하였다.

그런데 편지가 이상했다. 볼펜을 꾹꾹 눌러쓴 아버지의 편지는 삐둘빼둘했다. 맞춤법도 여기저기 틀렸다. 마치 홍희가 초등학생때 쓴 글씨같았다. 홍희는 놀라웠다. 엄마가 글자를 모르는 것은 알았지만, 유식하게 보였던 아버지가 글씨도 잘 못 쓸 줄은 몰랐다. 큰오빠가 이 편지를 받아본다면, 군인들 틈에서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고 자신을 부끄러워할까 싶었다. 홍희는 그래서 아버지가 직접 쓴 손편지를 내용그대로 옮겨 적었다. 최대한 반듯하게, 맞춤법이 틀리지 않게 적었다. 그리고 봉투에 담았다.

다음날, 아버지가 홍희에게 물었다. 어제 편지 부쳤나? 홍희는 자랑스레 말했다. 내가 다시 써서 오늘 부치려고 가져간다고. 잘했다고, 글씨도 잘 쓴다고 칭찬을 해줄거라 잔뜩 기대했는데 아버지는 그때까지,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는, 정말이지 불같은 화를 내었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자식이 부모를 부끄러워할 것이란 생각으로 드는 더 큰 부끄러움.

홍희는 당시에 아버지의 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속이 상하고 울고 싶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왜 그때 그렇게 철없는 짓을 했나 후회했다. 아버지의 가슴에 빠지지 않을 대못을 박았구나 눈물이 났다.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딸이 준 삐뚤빼뚤한 손편지를 사랑으로 받아보면서, 아버지의 삐뚤빼둘한 손편지는 더 큰 사랑임을 깨닫는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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