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변화가 내일의 전통 형식 틀 벗어나 표현에 집중”
“오늘의 변화가 내일의 전통 형식 틀 벗어나 표현에 집중”
  • 황인옥
  • 승인 2018.06.2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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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6.29 선언 등
격동기였던 1980년대
장르 벽 허문 예술 지향
극재 “범람하는 외래풍조
정체성 유지하고 수용해야
현대미술-전통 조화 필요”
70년대 전후 칼리그래피 충동
즉흥·필적·미풍 등 작품 선봬
1990년대 접어들어 본격 확산
극재 작 즉흥 1986년
극재 작 ‘즉흥’(1986년)
극재작-필적-1987년
극재 작 ‘필적’(1987년)

극재 정점식 <10>

2007년 가을이 올 무렵이었다. 故극재 정점식 선생(이하 극재)은 단정한 정장차림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대구미술비평연구회(이하 비평회)에서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저녁때가 되어 필자와 홍선생이 함께 대덕맨션으로 갔을 때 여사님은 선생이 아침부터 우리를 기다렸다고 귀뜸을 했다. 당시 극재는 대구미술비평연구회 고문이었다. 고령이어서 비평회 모임에는 못 나오고 행사가 있을 때면 참석을 하곤 하였다. 비평회는 그런 극재를 특별히 모시는 자리를 마련했다. 앞산 밑 한정식 집에서 회원들과 함께 하는 조촐한 식사자리였지만 당신을 향한 대구 미술계 후배들의 존경심과 배려를 무척 고마워했다. 그날 극재는 회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한 시 한편을 읊어주기도 하였다. 당시 소화력이 약했던 극재는 소식을 하였고 오래 앉아있는 것도 무리여서 회원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댁으로 모셨다. 연로한 극재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필자의 손을 꼭 잡으며 비평회의 발전을 빌어주었다. 공식적인 자리 참석은 아마도 그날이 마지막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90의 고령에도 말쑥하게 차려입고 삶의 긴장을 늦추지 않던 극재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1980년대는 사회변화에 급격한 물결이 일던 시기이다. 1980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한 해이며, 1982년에는 88서울올림픽을 하기로 결정한 해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인들의 자부심은 커졌다. 1981년 이후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중산층의 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한국 역사상 최대의 경제 호황을 누렸다. 경제 성장과 수출 증가를 거치면서 전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중산층의 비중도 두터워졌다. 또한 70년대까지만 해도 극소수의 부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자가용 자동차를 보유한 가정이 크게 늘게 되어 마이카 (My Car)가 유행어가 되었다. 1985년의 한국의 GNP는 2310달러였으며, 1980년대에는 컬러 방송이 시작된 때이다.

한편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5.17 내란 등이 일어난 제 5공화국 시대였다. 경제성장과 맞물려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치열한 예술가 정신이 혼돈과 혼란과 맞닥뜨렸던 격동의 시기이기도 하다. 삶과 인간 현실의 문제는 예술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 전시에도 드러났다. 또한 1988년 3월 14일 동아일보 6면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한국화, 서양화, 조각 등 우리 미술계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장르개념이 깨져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 같은 움직임은 ‘고착된 장르개념으로는 현대의 확대된 표현양식을 담을 수 없으며 양식과 정신성의 깊이를 제대로 표출할 수 없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예술사조의 추세가 각 장르끼리 어울리고 자연스럽게 만나는 총합예술을 지향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 속에서 더 폭넓은 지평을 열어 ‘동양화’, ‘서양화’라는 명칭에서 해방되고 재료나 표현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특히 미술관계자들은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미술대학의 편제와 커리큘럼의 개혁을 강조했다.

극재는 1980년에도 계명대학교 서양화과 교수였으며 1983년에 정년퇴직을 한다. 시대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당시 극재의 태도는 그가 몸담았던 학교와 후학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계명대학교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도 줄곧 동양화과와 서양화과는 독립성을 유지 지속되었다.

동양화과는 2018년 정공 교수의 퇴직을 기점으로 폐과되고 서양화과는 여전히 신입생을 맞이하고 있다. 극재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는 한결같았는데 1985년에 기록한 ‘현대미술의 전통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도 그의 예술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의 계승’은 우리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물질이나 또는 사상이 오늘날에도 뜻이 있고 값어치가 있고 용도에 따르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계승하고 그것을 소중히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변화하는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합리화되고 기계적인 기능화시대에 있어서 좀처럼 유물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승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졸속(拙速)으로 그대로 버리는 수가 많다. 그것에 대치해서 받아들이는 외래풍조의 무비판적인 도입은 국적불명의 조형물의 범람을 초래하게 한다.

우리 전통의 유물들은 반만년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삶의 애환(哀歡)이 얽혀 있는 조형물이다. 그것은 반만년 그대로 이어온 것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 종교나 생활의 그때 그때의 의식변화에 따라서 변조되고, 개량되고, 갱신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것이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단절의 위기에 놓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외래적인 풍조를 받아들이는 풍조에 있어서는 우리들 자신을 의식하면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들의 민족적인 생리나 정신을 통해서 작용되고 갱신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그것은 무리하게 억지로 조작시키는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감수성(感受性) 말하자면 우리들의 집단적 생리 속에서 연연히 이어오고 있는 침잠된 생리적 특성을 통해서 오늘날의 것으로 갱신시키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창조물이며 변화하는 내일의 것의 전통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예술작품에 취급되고 있는 ‘대상’을 보고 우리 전통적인 것으로 속단하고 만다. 달이 떠 있는 그림 따위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 자연적인 환경은 우리들의 생활정서와 관계하고 있지만 이런 풍월을 읊은 아취(雅趣)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사람들도 인도나 서구 사람들도 같은 화제(畵題)를 가지고 있다. 예술이란, 특히 오늘날의 예술은 그 대상의 소재(素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하느냐의 문제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가락으로 부르는 각자의 형식이 있고 이 형식 속에 담겨져 있는 체취(體臭)와 같은 것이 전통의 향기라 하겠다. 그것은 먹이나 색채 선이나 면의 조화(造化)의 암유(暗喩) 속에 스며있는 우리들의 생리적인 외침과도 같은 것이다.” (정점식, 現實과 虛像(현대미술의 전통에 대하여), 도서출판 그루, 1985, pp.158~160)

한국적인 것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그것이 더욱 절실했다. 일제강점기와 시대적인 격변을 두루 겪은 극재에게 예술의 ‘현대와 전통의 만남’에 대한 고민은 화두처럼 따라다녔다.

‘심적 오토마티즘과 예술의 기능’ 이라는 글에서 극재는 이와 같은 고민과 견해를 밝혔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 한국의 현대미술은 국제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관련하면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넘어가기에는 무엇인가 서운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앞만 보고 뒤돌아볼 줄 모르는 성향 속에는 스스로의 동기에서보다는 다른 힘에 이끌려가는, 여유를 잃은 초조한 걸음 같은 것이 있었다. 따라서 나는 그때의 아방가르드라든지 컨템퍼러리(contemporary)라는 말의 난무에 대해서 식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鄭點植 畵集, 圖書出版美術公論社, 2008년, 2008년, p85)

1980년대의 극재의 작품에서는 서체의 흔적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1970년대를 전후해서 내 속에 잠재하고 있던 칼리그래피colligraphy한 충동을 드러내는 작업을 시도했다.”(鄭點植 畵集, 圖書出版美術公論社, 2008년, 2008년, p84) 이를테면 1986년<즉흥>, 1986년<무제>, 1986년<와상>(69×48㎝), 1987년<필적>(43×68㎝), 1986년<미풍>(캔버스에 유채), 그리고 1989년<누드>(89.5×115㎝,캔버스에 종이 아크릴), 1989년<필적>과 1989년<필적>(108×120㎝) 등의 작품이 그렇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19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 그것이 눈에 띌 만큼 확산된다.


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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