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꺼먼 얼굴로 잠시 들른 남편 모습이 마지막”
“시꺼먼 얼굴로 잠시 들른 남편 모습이 마지막”
  • 김지홍
  • 승인 2013.06.1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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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몰군경 유족 이복기 할머니

전쟁 끝날때 쯤 ‘행방불명’

자식도 없이 갖은 고생… 보훈청 배지, 가슴에 묻어
/news/photo/first/201306/img_100059_1.jpg"전몰군경유족할머니/news/photo/first/201306/img_100059_1.jpg"
이복기(81) 할머니가 40년 전에 찍은 가족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속이 답답해서 집에 그대로 못 있겠다”

대구 달서구 상인동에 사는 6·25 한국전쟁 전몰군경 유족인 이복기(81) 할머니는 매일 새벽마다 역경을 이겨온 세월을 되뇌이며 산책을 다닌다.

11일 오전, 할머니는 길에 핀 들꽃을 꺾어 집에 있는 음료수 병에 고이 꽂아놨다. 들꽃 뒤로 벽에 촘촘히 걸려진 사진들은 할머니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부의 연을 이어줄 자식도 낳지 못했지만 가족 사진에는 양자로 온 자녀와 손녀들이 할머니 옆을 지켜주고 있었다.

지난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때 할머니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쓴 종이 한 장으로 친정인 청송에서 4㎞ 가량 떨어진 동네로 시집을 갔다. 당시 18세.

“당시 아무것도 모른 채 속아서 시집갔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시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신랑은 6남매의 맏이였다. 그때부터 시동생들과 3살, 5살, 9살된 시누이들을 보살피며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5여년 동안 시아버지는 친정 한번 안 보내줘서 눈물로 버텼다”는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의 고생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은 직업 군인이었고, 안동에 있는 훈련장에서 청송까지 한번씩 말을 타고 왔다갔다했지만, 할머니는 정작 남편이 다가오면 피하기 바빴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땐 아무것도 몰랐고, 곁에 따라오니 무섭더라고”며 18세 소녀처럼 부끄러워했다.

지난 1952년 한날 한시에 남편과 시동생에게 날아온 영장을 들고 집을 나서던 남편의 뒷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쟁이 끝날때 쯤 시동생은 돌아왔지만, 남편 대신 돌아온 것은 ‘행방불명’이라는 말이었다. 남편은 당시 22세였다.

할머니는 “군복을 입고, 얼굴은 시커멓게 하고 머리에 풀을 마구잡이로 꽂고 집에 잠깐 들렀던 모습이 또렷하다”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는 “내랑 살아보지도 못하고,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됐네. 나는 남편이 지켜놓은 이 나라를 항상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시아버지는 시동생의 자녀 2명을 할머니에게 입적시켰고, 할머니는 이 아이들을 내 목숨처럼 여기며 살았다.

“고생은 말도 하지 마라. 직접 논을 마당에 풀어놓고, 농사도 하고, 새벽 번개시장 가서 도매로 나물도 떼와서 팔고. 사람들이 ‘알뜰 할매’라고까지 했다”고 했다.

온갖 억척스런 일을 했던 할머니는 집안의 가장으로 시누이를 책임지고, 자식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할머니는 북한에 대해 “안주까이(아직까지) 그저 밉지. 원수가 되고도 남지”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이 할머니는 오늘도 옷을 갈아입으면서 옷깃에 달린 보훈청 배지도 함께 갈아끼웠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선열에 대한 애국심과 내일에 대한 희망의 뜻을 담은 배지를 할머니는 어김없이 아픈 가슴에 묻었다.

“매일 같이 있어야제. 보훈청에서 해준거여”라며 보훈청 배지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남편의 유해도 아직까지 찾지 못했지만, 현충원에 남아있는 남편의 ‘황경복’ 이름 석 자는 할머니의 마음 속에도 여전히 간절하게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오늘도 가슴 속 응어리를 다 풀지 못한 채 베란다 밖의 산을 묵묵히 쳐다봤다.

한편, 대구지방보훈청에 따르면 대구경북 6·25 전몰유족의 수는 배우자, 수권자녀를 포함해 5천500여명이 있다.

김지홍기자 kjh@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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