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史 변화마다 새 도전장 던져
공연史 변화마다 새 도전장 던져
  • 승인 2013.06.1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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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도시 대구, 亞 중심 만들것

<문화人> 이유리 딤프 집행위원장
애당초 제7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하 딤프)이 막을 내리고 딤프 결산을 겸한 인터뷰를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예상보다 앞당겨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그녀는 ‘공연문화중심도시 대구’의 핵심 콘텐츠인 딤프의 실무적인 수장으로서, 정체에 빠진 딤프를 구할 여전사가 아닌가. 제7회 딤프가 임박해 오면서, 불과 3개월여 전에 딤프 집행위원장을 맡아 활동의 근거지를 서울에서 대구로 옮긴 이유리(여·48) 집행위원장에게도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인생여정, 삶의 지표, 추구하는 가치, 하다못해 취미와 생김새까지, 이 낯선 여성에게 대구가 호기심의 촉을 곧추세우고 있다. 그래서 계획을 당겨서 지난 11일 대구경북디자인센터에 새둥지를 튼 딤프 사무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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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제7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집행위원장은 대구와 딤프에서의 생활이 “끝없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느낌이지만 평생목표 의식이 강한 저에게 분명한 목표가 생겼고, 지금은 달리기만 하면 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죠. 딤프가 끊임없이 제게 생기를 주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사진=이명하 객원기자
제7회 딤프가 임박한 탓에 사무실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각자 맡은 일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분주한 가운데도 어수선하지 않았고, 단단한 팀웍이 감지됐다. 전 직원이 그녀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다. 서로 구면이라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와 편안한 분위기로 마주앉았다.

- 초면 때와 목소리가 다른데요.

“딤프 일로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하나부터 열까지 실무를 챙기다 보니 피로도 겹치고, 말도 많이 하게 돼서 목이 쉬었네요. 하지만 목표가 뚜렷한 일이라 피로쯤은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죠.”

- 이유리 집행위원장이 부임하고 열리는 첫 딤프라 기대가 큽니다. 준비는 잘 돼 가나요?

“이번 딤프는 사실상 이전 집행위원장 체제에서 셋업 된 상태라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제한적이어서 제 의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나름의 묘미를 살려 공연의 내실을 기하고 질적 향상을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구를 아시아의 뮤지컬 생산기지로

- 제한된 상황에서 이유리가 준비하는 올해의 딤프는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는 한국과 일본이 유한회사를 만들어 제작한 ‘뮤직박스’와 일본 관광객 유치를 염두에 둔 딤프 K-뮤지컬 콘서트 등을 추가한 것인데요. 이것은 한류바람을 타고 한국 뮤지컬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일본 진출을 위한 물꼬트기용으로 보시면 됩니다. 지금까지의 딤프가 중국시장에 관심을 보였다면, 이제는 일본과 아시아로 시장을 확대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죠. ”

- 또 달라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민참여형 축제를 만들기 위해 체험형 부대행사를 대폭강화 한 것입니다. 딤프가 명실공히 시민축제로 거듭나겠다는 노력으로 보시면 됩니다.”

- 흥미로운 몇 가지만 소개하신다면.

“뮤지컬의 소품과 의상만들기 체험 행사인 ‘뮤지컬 만들기’와 뮤지컬 분야의 최고 전문가와 함께 하는 뮤지컬 이색 직업 탐험 프로그램인 ‘뮤지컬 직업세계 탐험 토크쇼’를 꼽을 수 있겠네요. 벌써부터 학생들의 단체신청이 잇따르고 있어요.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맘마미아 댄싱퀸’ 프로그램입니다. 주부 또는 싱글 여성들을 모집하고, 오는 27일에 대구실내체육관에서 뮤지컬 ‘맘마미아’ 스타 이태원씨와 연습할 예정이에요. 28일에 대구야구경기장에서 공연을 펼칠는데, 그 중에서 몇 십명을 뽑아 폐막 무대에 세울 계획도 갖고 있죠.”

그녀의 임기는 2년이다. 무언가를 성취하기에 짧은 시간이다. 그녀는 대구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을까.

“올해가 시민축제로 변신을 시도하는 해라면, 내년에는 관광산업으로서의 초석을 다지고, 대구지역에 젊은 공연 전문 기획자와 창작자를 육성할 계획입니다.”

- 뮤지컬을 관광산업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 쉽지 않은데.

“막상 서울에서 대구로 와서 일하면서 대구가 뮤지컬도시라고는 하지만 서울의 변방임을 절감하게 되요. 그렇더라도 대구는 지난 6년 동안 뮤지컬과 관련해 기적 같은 성과들을 쌓아왔고, 그 기반들을 활용하면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어요. 그 해법이 대구를 아시아의 뮤지컬 생산기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나요?

“뮤지컬이 공연분야 전체시장의 60%를 차지할 만큼 절대적 지위에 있고, 라이센스뮤지컬의 해외 오리지널 투어공연 붐도 일고 있기 때문에 대구에 생산기지를 만들면 그들이 이를 활용해 아시아 투어를 계획할 수 있고, 또 우리공연의 해외진출도 용이해 지는 효과를 거둘 수 있죠.”

- 뮤지컬을 관광산업으로 연계시키는 것이 가능합니까.

“뮤지컬의 도시 런던은 뮤지컬 관광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브로드웨이도 그렇고. 대구도 그동안 대구가 일궈온 성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거죠. 딤프에서 좋은 공연을 기획하고 구체적인 마케팅과 전략으로 외국관광객에게 어필하면 해 볼만 합니다.”

◇공연기획 전문가가 된 문학소녀

이 집행위원장은 극단 연희단패거리 창단멤버로 시작해 청강문화대학교 뮤지컬과 교수까지, 공연계 섭렵도 모자라 전문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넓혀왔다. 현재 대구국제뮤지컬축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우리나라 공연사의 진보단계마다 그녀가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그녀는 혁신의 시기마다 태풍 속에 던져진 삶을 살았다.

창의적이고 종합적인 역량을 요구하는 공연기획자라는 직업이 그녀에게는 맞춤 옷 같은 것이었지만, 애당초 그녀는 문학가로서의 삶을 꿈꿔 왔다고 한다. 청소년 시기 때는 전국백일장 등에서 상을 받는 싹수가 보였던 문학소녀였고, 대학에서도 독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4학년 때 시인이기도 했던 이윤택 선생과의 인연으로 ‘연희단거리패’의 창단멤버로 들어가면서 운명적으로 공연전문기획자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고등학교 시절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한국초연 공연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죠. 그때 나도 이런 것 만드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어요. 그러다 연희단 패거리에 우연히 들어가 연극인으로 인생을 시작하게 된 거죠.”

하지만 연희단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생활고가 밀려 왔고, 돈을 벌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절박함이 생겨서였다. 방송국에서 TV구성작가 생활을 시작했고, 부산MBC에서 멘트와 원고, 믹싱까지 하는 FM DJ 생활을 몇 년간 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공연사에 또 하나의 사건에 그녀가 던져지게 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차원의 복합문화공간이 ‘동숭아트센터’의 기획부장으로 스카웃 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국립극장만 존재하던 시절이어서 민간소유의 복합문화공간 탄생은 초유의 관심사였다고 한다. 이때가 본격적으로 그녀가 전문공연기획자로서의 이력을 쌓기 시작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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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동숭아트센터의 기획부장으로 일한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그때는 전문적인 복합문화공간이 없던 시절이라 전문공연기획자도 드물었어요. 그때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고, 왕성한 혈기에 항상 날이 서 있던 시절이었지요. 마치 노련한 전문여성인양 갑옷을 입고 산 시절이었죠. 30대 초반에 너무 막중한 역할이 주어져서 였겠죠. 그때의 저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전투사적인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것 같아요.”

- 30대 초반 이유리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내 손으로 당시 영화관으로 주로 활용되던 동숭아트센트 대극장을 공연전용관으로 바꾸는 것, 국내 최초로 공연장 상주 무대기술팀을 구성하는 것, 동숭아트센터 제작 공연을 프로듀싱 하는 것이었어요. 결국 95년도에 이 세 가지 목표를 다 이루고 나왔죠.”

그녀의 도전과 변신은 멈춤없이 이어졌다. 1999년 또 한 번의 혁신적인 변화가 찾아오는데, 문광부산하인 서울예술단에 프로듀서로 가게 된 것이다. 그녀가 컬티즌이라는 공연 기획 전문 회사로 주목을 받으며 당시 삼성영상사업단 최초 제작 ‘창작대중가극 눈물의 여왕’ 기획을 막 끝냈던 시절이다.

“당시 10억 규모의 창작뮤지컬을 제작하는 큰 역할이 제게 주어졌어요. 그때 제가 프로듀서로 가면서 조건을 내걸면서 선례를 하나 만들었죠. 공무원 체제에 편입되면서 호봉제가 아닌 연봉제를 제안했고, 호칭도 프로듀서로 붙여달라고 했죠. 전문성을 인정해 달라는 거였는데, 공무원 체제에서 그건 파격이었는데 받아들여졌어요.”

◇늘 나로 인해 뭔가 새로워 지기를

2000년대 초반, 그녀는 또 한번의 도전장을 내민다. 당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 발을 들여 놓은 것. 배우 박상원과 가수 이문세가 만든 ‘와더 엔터테인먼트’에 그녀가 기획이사로 영입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3년도에 12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창작뮤지컬 ‘페퍼민트’의 제작자로 또다시 변신을 시도한 것. 최초로 아이돌 그룹의 ‘바다’를 캐스팅하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추진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앞서갔을까. 공동제작사가 부도나면서 그녀는 파산을 맞게 된다.

- 청강문화대학교 뮤지컬과 교수는 그 후에 가신건가요.

“당시 뮤지컬 관력학과를 셋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죠. 뮤지컬과 관련해 전문 지식이 적립이 안된 시기여서 또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였죠. 저는 요청을 수락하면서 국내유일의 전원합숙체제를 제안했는데 받아들여졌죠. 뮤지컬은 철저하게 협업해야 하는 분야기 때문에 그런 기질을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제안했었죠. 제가 제도권의 주입식 교육에 두드러기를 보여왔고, 철저하게 현장에서 모든 것을 배웠기 때문에 아이들을 현장형 전문가로 키우고 싶은 이유가 강했죠.”

- 대학을 휴직하고 공연의 중심인 서울에서 대구로 오는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나는 나로 인해 새로운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을 즐깁니다. 딤프는 매우 힘든 일이지만 공연기획자로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가슴뛰는 일이고, 재도약이 필요한 딤프에 던져지는 일은 그동안 제가 살아온 창조자로서의 삶의 연속이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었어요.”

- 딤프가 이 위원장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지금까지 많은 분야에서 기획 일을 해 왔는데, 어쩌면 그 모든 여정이 딤프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그만큼 딤프는 종합적인 역량을 요구하는 곳이지요. 제 인생이 선례가 없고, 모델이 없어 항상 판단이 숙제였던 선구자적 삶에 던져졌다면 딤프는 그 모든 삶들을 종합해서 풀어놓는 또 하나의 장인 셈이죠.”

- 대구에 온지 3개월여 됐는데 인상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대구시의 특별한 관심과 지원이 떠오르네요. 대구시의 문화관련 공무원들의 수준도 공연기획자에 버금가고, 공연에 대한 사랑도 전문가 못지않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이는 다른 어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며, 이것이 대구만의 특별한 힘과 가능성으로 비춰졌어요.”

- 대구와 딤프에서의 생활, 행복한가요.

“끝없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느낌이지만 평생 목표 의식이 강한 저에게 분명한 목표가 생겼고, 지금은 달리기만 하면 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죠. 딤프가 끊임없이 제게 생기를 주고 있으니까요.”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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