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에 삼수장어 맛 알리기 위해 오늘도 전진”
“세계인에 삼수장어 맛 알리기 위해 오늘도 전진”
  • 승인 2013.08.13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영진 삼수장어 대표
젊은 시절 다양한 분야 외식업 성공과 실패 경험
1992년 주위에서 자금 빌려 ‘삼수장어’ 첫 오픈
장영진삼수장어대표2
장영진 대표는 지난 2009년 외식사업 인생의 스토리를 담은 ‘사람이 좋다. 삼수가 좋다’라는 책 수익금 전액을 새마을문고에 기부하는 등 나눔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연일 불볕더위가 대구·경북지역에 맹위를 떨치면서 건강한 여름을 위해 많은 시·도민들이 ‘더위 예방주사’ 역할을 할 수 있는 각종 유명 보양식 전문점으로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여름은 영양 보충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계절로 땀을 흘리는 과정에서 많은 영양분이 소모된다. 이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의 옛 선조들은 고단백질의 음식 섭취를 통해 건강을 지키는 삼계탕과 영양탕, 장어요리 등 다양한 보양식을 개발했고 현재까지 이 음식들은 국민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장어요리는 강한 자외선과 먼지, 건조한 피부에 탄력을 주는 것은 물론 고소하고 담백한 맛, 풍부한 지방과 단백질, 비타민A 등의 영양소 때문에 여름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원기 보충을 위한 보양식으로 손색이 없다.

이 때문에 대구지역 유명 장어요리 전문점들은 여름철은 물론 1년 내내 많은 손님들로 넘쳐나고 있지만 대구의 대표적 장어요리 전문점을 꼽으라면 많은 시민들이 주저 없이 ‘삼수장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장영진 삼수장어 대표는 처음 외식사업을 할 때부터 장어요리 전문점을 경영하지 않았다. 그는 삼수장어의 문을 열기 전 두부전문점과 삼겹살전문점 등을 운영했으나 여러 이유로 몇 차례의 사업 실패와 성공을 거듭한 끝에 현재의 삼수장어를 대구의 대표적 장어요리 전문점으로 만들었다. 최근 두산점에서 삼수장어를 이끌고 있는 장영진 대표를 만나 그의 인생 여정에 대해 들어봤다.

◇외식사업과 인연을 맺기 전의 장영진

1957년 2월 경북 의성에서 5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난 장영진 대표는 5살 되던 해 가족들과 대구 중구 남산동으로 둥지를 옮기면서 대구와 인연을 맺었다.

장 대표의 아버지는 대구로 온 뒤 조그만 쌀가게를 운영했고, 그나마 형편이 나쁘지 않았으나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큰형과 둘째 형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했다.

형들의 도움으로 그는 1975년 대구 능인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원치 않게 재수를 해야만 했고 “취직이 잘 된다”는 말에 1976년 당시 전국에서 유일했던 영남이공대학 자동차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기계를 다루는 일에 적성과 흥미가 없었던 그는 학교생활을 소홀히 했고, 밖으로만 나돌다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은 결과 현역 1급 판정을 받은 뒤 1학년을 마치고 1977년 해병대에 자원 입대, 포항 1사단 포병단에서 수송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1979년 여름경 나온 휴가에서 큰 형님의 사업이 부도가 나자 살고 있던 집이 넘어가는 등 가족 모두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당시 큰 충격을 받은 장 대표는 우울증을 앓기도 했으나 부대로 복귀, 겨우 마음을 추슬러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고 만기전역한 뒤 제대 3일 만에 막노동 일을 했다.

이후 친구 소개로 한 정수기 회사의 영업사원 일을 1년 동안 했으나 단 1대의 정수기도 팔지 못하면서 그나마 막노동으로 벌어놓은 약간의 돈과 시간을 날렸다.

◇외식사업 입문 및 걸어온 길

장영진 대표는 정수기 영업사원을 하며 인생의 고배를 마신 후 돈을 빌려 겨우 대학 등록금을 마련, 1982년 복학한 뒤 이듬해 졸업했으나 마땅히 취업이 되지 않자 당시 대구시내 로얄호텔 뒤편에서 ‘족발집’이라는 다양한 메뉴를 취급하는 실비집을 운영하던 둘째 형님에게 몸을 의탁, 철가방을 들고 동성로 일대를 누비는 배달 일로 처음 외식업과 인연을 맺었다.

이 덕에 그는 ‘족발’이라는 별명으로 인근에서 유명해졌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둘째 형님이 그에게 가게를 맡기고 더 큰 식당을 차려 나갔다.

얼떨결에 외식업 경영인의 길로 처음 들어선 장 대표는 1983년 6월 가게 단골손님이던 현재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식당 방 한 켠을 비워 신혼살림을 꾸린 뒤 본격 가게 경영에 나섰다.

하지만 우연히 음식업 장사에 뛰어든 탓에 벌이가 신통치 않았던 장 대표는 장사 방법과 업종 변경 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고, 단순화·전문화·차별화만이 살길이라는 결론을 얻고 팔공산 파계사 인근 마을에서 제조한 두부를 이용한 ‘촌두부집’이라는 두부 전문음식점으로 메뉴를 바꿔 나름 대박을 쳤다.

이후 ‘촌두부집’이 자리를 잡혀갈 무렵 어느날 둘째 형님이 제주도에서 모텔사업을 하자고 제안, 우여곡절 끝에 이를 받아들이고 셋째 형님에게 식당을 넘겨준 뒤 아내와 함께 제주도 생활을 했으나 아무 소득 없이 고생만 하고 석달 만에 접고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대구로 온 그는 먹고 살 궁리를 하던 끝에 다시 식당을 하는 것으로 마음먹고 어렵게 자금을 마련해 서문시장 인근의 한 목공소에 ‘삼수갑산’이라는 삼겹살 전문점을 열었다.

그는 사업 전략으로 ‘박리다매’를 선택, 당시 대구에서 가장 싼 가격에 삼겹살을 팔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탄력이 붙기 시작, 입소문이 나면서 가게 오픈 2년 후에는 당시 돈으로 하루 최고 매출 100만원을 올리기도 했다.

장영진 대표는 “당시 정말 손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며 “마침내 하루에 돼지 한 마리를 파는 대박 가게로까지 성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 가도에 제동이 걸렸다.

사업에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삼겸살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동성로 동아백화점 옆 당시 티파니극장 지하에 ‘오메불망’이라는 일종의 회관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석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다시 그는 삼겹살 가게에 전념했고, 매출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가게를 확장까지 하게 됐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장사가 매우 잘 되자 건물 주인이 나가줄 것을 요구했고, 어느 정도의 권리금만 받고 쫓겨났다.

이후 한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는 가끔 친구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였고, 어느 날 우연히 대구 달서구 월배쪽에 위치한 N장어식당을 찾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장어요리를 접했다.

◇장어요리를 우연히 접한 뒤 드디어 장어식당의 문을 열다

당시 대구의 가장 대표적인 장어요리전문점인 N장어식당을 접한 뒤 그는 많은 손님과 빠른 젓가락 속도를 본 것을 잊지 못했고, 줄곧 장어요리 쪽에 모든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외식업 분야에서도 비교적 고부가가치 업종이라는 판단이 선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N장어식당을 답사하고 장어요리를 새로운 아이템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는 마침 N장어가 권리금 관계로 건물 주인과 관계가 좋지 않자 맞은편에 보다 큰 장소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1989년 N장어식당이 있던 자리에 가게를 얻어 처음 장어요리 식당을 열었다.

하지만 N장어 주인이 영업허가증을 계속 갖고 있었던 탓에 6개월간 장어요리 전문점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張회집’이라는 식당을 오픈하면서 향어·잉어·메기 매운탕을 우선 메뉴로 장사를 하면서 여러 달을 허송세월을 보냈다.

6개월이 지난 후 N장어식당으로부터 영업허가증을 돌려받고 다시 상호를 ‘張장어집’으로 바꾸고 본격 장어요리를 선보였으나 이미 N장어식당이 기존 단골손님들을 모두 확보하는 바람에 3년여 시간 동안 시간을 허비한 뒤 결국 이곳에서의 장사를 접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이미지로 장어요리식당에 도전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삼수장어 탄생 배경 및 그의 사업 전략

오랜 고민 끝에 장 대표는 1992년 3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여러 곳에서 많은 돈을 빌려 대구 서구에 위치한 대구호텔 맞은 편에 대형 규모의 ‘삼수장어’를 처음 오픈했다.

그의 본격 장어요리 전문 식당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건물주와의 이해 관계로 어쩔 수 없이 1층과 2층 대형 매장을 얻었으나 2층은 사무실 용도로 허가가 난 것을 뒤늦게 알고 법적 문제를 해결한 뒤 우여곡절 끝에 2층엔 장어뷔페를 하게 됐다.

이곳에서 그는 많은 금전적 어려움을 겪다 이현공단 및 성서공단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40~50대 직장인들이나 비즈니스 사업가들이 많이 찾으면서 결국 3년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등 성공을 거두면서 모범음식점으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성공에 배가 아팠던 건물주는 임대료 인상을 계속 요구했고, 그는 임대료 부담에 본인 소유의 건물에서 장사를 하기로 결심, 많은 돈을 빌려 땅을 매입하고 건물을 지어 1998년 10월 동신교~수성교 사이 신천동로 인근에 현재의 수성점의 문을 열었다.

초기에 이곳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면서 많은 적자를 거듭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장 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이 부끄럽고 돈을 빌린 사람들한테 많이 미안했다”며 “어디론가 숨고 싶었고 아침마다 눈 뜨기가 싫었을 정도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이곳에 문을 연 후 5년 동안은 매일 빚 갚기에 급급했다”며 “5년이 지나면서부터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수성점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성점이 안정을 찾아가자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고 다시 수성구청~남부정류장 사이 한 건물의 세를 얻어 2003년 3월 삼수장어 3호점인 범어점을 개업했다.

하지만 이후 세들어 있던 건물이 덜컥 팔려버려 쫓겨나야 함과 동시에 ‘장어 파동’을 겪는 이중고를 겪으며 수십억원의 돈을 날리고 결국 3년 만인 2006년 범어점을 정리했다.

장 대표는 “범어점을 정리했을 때가 외식사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된다”며 “엄청난 스트레스는 물론 매일 잠잘 때 죽는 꿈을 많이 꿨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2009년 수억원의 빚이 있는 상황에서도 다시 여기저기에서 많은 돈을 빌려 현재의 수성못 인근에 땅을 매입, 건물을 직접 지어 삼수장어 두산점의 문을 열었고, 이곳 건물이 대구시 지정 ‘아름다운 상점상’을 받는 등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 현재 대구를 대표하는 장어요리 전문점을 이끌고 있는 수장이 됐다.

◇장영진 대표의 앞으로의 꿈

삼수장어를 비롯해 여러 외식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그는 전문화·차별화 전략 덕택에 외식사업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또 경일대·영남대·계명대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차례로 받으며, 외식사업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이론적 뒷받침을 경험삼아 영진전문대 국제관광계열 겸임교수, 계명대 외식산업경영론 교수, 대구시관광협회 부회장, 들안길번영회장, 수성구새마을문고 회장 등 다양한 외부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울러 지난 2009년 자신의 외식사업 인생 스토리를 담은 책 ‘사람이 좋다. 삼수가 좋다’라는 책의 수익금 전액을 새마을문고에 꾸준히 기부하는 나눔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6월에는 들안길이 전국 3대 먹거리 명소에 선정된 것을 기념하고자 들안길 상가번영회장 자격으로 이곳을 전국 최고의 먹거리타운으로 알릴 수 있는 이색 홍보마케팅을 펼쳐 주목받았다.

들안길 축제 행사에 전국 최대 규모의 ‘1㎞ 김밥 만들기’라는 이색 이벤트를 마련해 이곳을 찾은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들안길을 더 크게 알렸다.

또 그는 삼수장어를 미국 뉴욕과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에도 각각 오픈해 전 세계인들에게 삼수장어의 맛을 선보이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현재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간 무료식당을 개업해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공익적인 최종 목표의 실천을 위해 준비 중에 있다.

장 대표는 “여지껏 내가 고객들에게 돈을 받고 식사를 드렸으니 이제는 돈을 받지 않고 어려운 분들에게 따뜻한 밥을 많이 드리고 싶다”며 “앞으로도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을 통해 항상 모험하는 삶을 사는 데 매진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밝혔다.

김무진기자 jin@idaegu.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