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명분 싸움도 교육이다
<대구논단> 명분 싸움도 교육이다
  • 승인 2009.05.2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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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후섭 (학남초등학교장· 교육학박사)

월여 전에 400년간 지속되어 오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이 시비에 대해 비판도 많으나 필자는 귀한 정신적 가치라고 보고 싶다. 병호시비는 퇴계(退溪) 좌우에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 중 누구를 상석으로 모실까에 대한 시비(是非)이다.

필자가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로는 먼저 학봉의 제자들과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나이가 더 많은 학봉을 상석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학봉은 서애보다 4살 더 연장이었던 것이다. 이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가치관이 바탕이 된 주장이라고 보여 진다.

그러자 서애의 제자들과 풍산 류씨 문중에서는 벼슬이 높은 서애를 상석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학봉은 관찰사를 지냈지만 서애는 영의정을 지냈던 것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벼슬의 높으면 사회에 기치는 영향이 크다고 보았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언덕(厓) 위에 학(鶴)이 있지 학 위에 어떻게 언덕이 있을 수 있느냐는 주장이 나왔다. 언덕(厓)은 서애(西厓)를 뜻하였고 학(鶴)은 학봉(鶴峰)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치기마저 느껴지지만 사물의 질서를 따지는 순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버들(柳)은 두면 둘수록 푸르러지지만 쇠(金)는 두면 둘수록 붉어진다.’는 반론이 나왔다. 이른바 `류류청청 김김적적(柳柳靑靑 金金赤赤)’론이었다. 버들(柳)은 류성룡을 뜻했고, 쇠(金)는 김성일을 뜻했다. 그러니까 버들은 나날이 무성해지지만 쇠는 둘수록 녹이 슬어 점점 삭아진다는 논리였다. 역시 사물의 이치를 사람에게 대입한 반론이었다.

그러다가 서애 문중에서 하회 마을 건너편에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짓고 이곳으로 류성룡의 위패를 옮겨가게 되자 사태는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안동 지방에 내려오는 야화이다. 그러나 이 시비는 서로가 바른 명분을 내세움으로서 보다 정통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정신적 논쟁으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명분 싸움도 중요한 기여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호계서원의 중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별 실익이 없는 공론에 매달려 일을 그르칠 것이 아니라, 대승적인 차원에서 상대방 문중의 서애를 상석에 모신다는 방침을 밝히고, 양 문중이 합의를 하였다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학봉과 서애는 퇴계 선생의 수제자로 각각 학파를 이끌고 있다. 즉 병호시비와 관련하여 학봉학파는 호파(虎派)로 서애학파는 병파(屛派)로 불리는데 이는 그만큼 따르는 문중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개성 고씨(산양, 녹문), 안동 권씨 화산파(가일), 선성 김씨(무섬, 우금), 순천 김씨(구담), 풍산 김씨(오미 오록), 하회 우천, 우복 정경세, 선성 이씨 고산파(상리), 회재파(양동), 대구 옻골 최씨 등은 병파로 분류되고,

의성 김씨(내앞, 지례, 금계, 해저), 전주 류씨(무실, 박실, 대평, 삼산), 광산 김씨 후조당파(외내), 안동 김씨 보백당파(묵계), 상락 김씨 송은파(사촌), 경주 손씨 우재파(양동), 풍양 조씨 검간파(승곡, 운평), 전주 최씨 인재파(해평) 등은 호파로 분류되고 있다.

최근 이들 학파의 후손들이 모임을 가지고, 공론(公論)없이 두 문중간의 합의만을 따를 수 없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400년이나 이어져 온 병호시비는 앞으로도 계속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비는 명분을 중시하는 선비 세계의 역학적 균형 활동으로서 우리들에게 명분 있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 문중에서는 임진왜란은 물론 항일독립운동에서 각각 더 많은 의병과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밑바탕에는 서로 높은 명분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길이 권장되어야 할 정신 가치가 깔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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