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예산으로 무한 감동 이끄는 게 나의 강점”
“적은 예산으로 무한 감동 이끄는 게 나의 강점”
  • 황인옥
  • 승인 2013.10.09 17: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북오페라단 김혜경 단장

지난달 ‘에밀레- 그 천년의 울음’ 공연 찬사 이어져

결혼 후 음악과 멀어져 살다 유학 중 기획자 꿈 키워

창원문화재단 재직시 강한 추진력·열정 인정 받아
/news/photo/first/201310/img_110574_1.jpg"김혜경경북오페라단단장/news/photo/first/201310/img_110574_1.jpg"
김혜경 단장은 “예술인들을 위한 지원과 복지정책을 끌어내 예술인들의 삶을 보다 안정적으로 만들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최종 바램”이라고 말했다.
사진= 객원기자 이명하
세상에는 ‘유에서 유를 더하는 사람’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 경북오페라단 김혜경 단장은 후자 편의 대표 주자다.

전자든 후자든,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든 철저하게 후자적 삶을 지향해왔다.

그런 김 단장을 처음 만난 자리는 두달 전,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창작오페라 ‘에밀레-그 천년의 울음’ 공연 취재 자리에서였다.

당시 첫 만남에서 “대구에 저런 인물이 있었나”하는 의문을 가질 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호탕한 성격과 진솔함, 유쾌한 열정은 마주 앉은 이를 단숨에 휘어잡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날의 기억은 잊혀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에밀레-그 천년의 울음’을 관람한 사람들로부터 ‘오페라임에도 빨려 들어가는 재미를 느꼈다’, ‘수준급 공연이었다’ 등의 찬사들이 날아들어, 다시 그와 약속을 잡았다.

그와 그의 오페라이야기를 보다 깊숙하게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김 단장의 최근 근황은 극장경영과 문화행정가로 부임했던 창원에서 근거지인 대구경북으로 돌아와 오페라 ‘에밀레-그 천년의 울음’을 제작해 무대에 올린 것이다. 경북오페라단 창단 13주년과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3’의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지난달 5일 천마아트센터 그랜드홀 대극장에서 공연했다. 그는 이 무대를 통해 사설 단체의 역량을 넘어서는 출연진과 화려한 무대세트 박진감 넘치는 극의 흐름으로 호평을 이끌며 김혜경이라는 인물을 지역에 재각인 시키는데 성공했다.

- ‘에밀레-그 천년의 울음’은 어떤 작품인가요.

“진영민 경북대 교수가 작곡을 맡고 최현묵 수성아트피아 관장이 대본을 쓴 창작 오페라에요. 경북오페라단이 2003년 경주 천마총 야외무대에서 초연한 작품인데,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대한민국 창작오페라 최우수 선정작으로 뽑히기도 했죠. 내용은 에밀레종 제작을 둘러싼 설화를 모티브를 하고 있어요.”

-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고, 또 4년간의 외유 후 지역 팬과 첫 만남이었던 만큼 신경이 쓰였을텐데.

“완성도 높은 최고의 작품을 선보이려는 일념으로 이일구 지휘, 음악감독 양성원과 바리톤 노운병·홍순포, 테너 김동원, 소프라노 이정아, 메조소프라노 손정아 등 최정상급 기량을 보유한 성악가들을 캐스팅했어요. 여기에 오페라도 재미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철원 한울림 극단 대표를 연출가로 모셔서 극적인 요소를 더했죠. 또 경산시립합창단과 김죽엽무용단과 MBC교향악단도 함께 해 무려 100여명이라는 출연진이 만들어 내는 묵직한 감동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 민간 오페라로써 그 정도의 화려한 캐스팅과 규모가 제한적인 예산에서 가능한가요.

“김혜경이 다른 제작자와 차별화하는 지점이 그 점이라고 보시면 되겠지요. 저는 주어진 예산으로 공연을 올리는 인큐베이터 속 화초로 살아오지 않았으니까요. 치열한 환경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야생초 기질로 언제나 직접 발로 뛰며 스스로 예산을 만들고,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에 제 존재 가치와 보람을 찾는 삶을 살아왔어요. 이번 공연도 경상북도 문예진흥기금, 문화예술위원위 지원아래 각계각층의 메세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동분서주 했고, 결국 선 굵은 작품을 올릴 수 있었지요.”

기자가 문화부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김 대표와 최근에야 첫 만남을 가졌던 이유는 지난 4년간 그의 주 무대가 경남 창원이었던 탓이었다. 그를 만나기전 그의 이력과 활동 자료들을 먼저 찾았더니 공연 불모지나 다름없던 창원에서 ‘공연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켰다는 지난 기사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창원성산아트홀 관장과 창원문화재단 대표로 재직하며 강한 추진력과 열정으로 최고의 공연을 잇달아 유치한 것.

- 외지인, 여성이라는 점이 호의적이지 않았을텐데 국내 첫 여성 공채 관장을 움켜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보다 문화예술 인프라가 높은 곳으로 알려진 대구경북의 수준이 한몫 했다고 봐요. 또 저의 혁신적인 마인드와 추진력과 예술가로서 가지고 있는 콘텐츠 등도 좋게 봐 준 것 같아요. 성과를 낼 수 있는 잣대로 공정한 심사가 가능했음을, 부임 후에 시정책과 열의를 통해 느꼈어요.”
/news/photo/first/201310/img_110574_1.jpg"오페라/news/photo/first/201310/img_110574_1.jpg'에밀레-그천년의울음/news/photo/first/201310/img_110574_1.jpg'공연모습/news/photo/first/201310/img_110574_1.jpg"
오페라 ‘에밀레-그 천년의 울음’ 공연 모습.

- 창원에서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창원은 기업도시이자 근로자의 도시라는 생각에 먼저 그들의 기호부터 조사했죠. 클래식을 중심으로 하되, 가능하면 그들의 성향에 맞는 공연으로 다가가려 했어요. 예산이나 인력이나 콘텐츠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조건 발로 뛰며 부딪혔습니다. 그것이 적중했던 거죠. 당시 그곳은 소득이 높았지만 문화에 목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점을 포착해서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퀄리티 높은 공연을 올리고, 교향악 축제와 합창제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맞춤형 공연으로 기획해 성공을 시켰어요.”

- 단기간에 존재감을 강하게 심으셨군요.

“제가 공연장을 맡고 1년쯤 되자 경남지역 언론으로부터 호응이 오기 시작했죠. 살아있고 열려있는 성산아트홀의 변신이라며 주목하더군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업과 기획사, 언론이 삼각축을 이루는 컨소시엄(consortium)이 가능해졌고 더욱 승승장구 할 수 있었어요. 그 덕에 제가 부임하던 2007년 공연기획 예산이 4억이던 것이 이듬해 7억, 연임한 그 다음해엔 12억으로 껑충 뛰었죠. 공연 인프라를 단기간에 끌어 올려주고, 시민들이 목말라 한 공연을 기획한 것이 의회에서 자발적으로 예산을 올려준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담당 실국과의 지원과 열심히 뛰어준 직원들의 노력이 있어 가능했지요.”

- 결국 전문 음악인 출신이라는 것과 CEO적 기질의 조화가 이룬 성과로 보이는데. 본인의 강점은 무엇인지.

“‘저예산 고효율’, ‘고품질 고감동’을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저의 강점이고, 이 점들이 중앙을 제외한 전국공연장 최고의 가동율과 재정자립도를 올리는 객관적 수치를 이끈것 같아요. 거기에는 제가 소명으로 여기는 진정성이 근본이 되었겠지요. 또 지금껏 음악을 전공해오며 음악적 안목의 지향점이 높아 아티스트들의 발탁에 유리한 이점을 가지고 있고, 국내외에 걸쳐 사회·경제·문화 분야에 두루 좋은 인맥을 가진 점도 큰 재산이라 할 수 있겠지요. 좋은 관계망을 가지고 있으면 고품격의 공연을 비교적 좋은 게런티로도 유치가 가능하게 되지요. 또 인맥과 세간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직접 좋은 아티스트들을 발탁하는 것도 저만의 큰 장점이겠지요.”

김 단장은 공연장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수장 이전에 그의 이름 앞에 소프라노라는 파트가 따라다니는 성악가다. 일본, 러시아, 캐나다 등지에서의 초청공연을 비롯해 KBS, TBC, 체코프라하교향악단, 대구시립교향악단, 경북도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 등과 협연하고, 오라트리오 ‘천지창조’, ‘메시아’독창자, 오페라 ‘춘향전’, ‘쟌니 스키키’, ‘루치아’, ‘일트로바토레’출연, 수차례의 KBS열린 음악회를 비롯해 각종 음악회에 500여회 출연하며, 정상급 성악가로의 길을 걸어왔다.

- 대학에서 촉망받는 성악유망주로 기대를 모으다 돌연 결혼으로 음악을 쉬었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때 무용을 시작했죠. 그러다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를 듣고 성악을 권유하셔서 자연스럽게 성악을 전공하게 됐죠. 대학에 진학해서도 유망주로 기대를 해주셨는데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전업주부로 음악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됐지요.”

- 졸업 후 10년 지난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고 유학까지,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텐데.

“대학원을 다니기 수년 전부터 예술에 대한 갈망으로 공연장을 많이 찾아 다녔어요. 목마름이었죠. 그러면서 다시 필드에서 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 대학원에 진학할 용기를 냈고, 내친김에 유학까지 다녀왔죠.”

- 경북오페라단 설립은 유학 후의 일인가요.

“1995년 유학을 다녀온 후 성악가로서의 삶에 기획자로서의 바람이 추가되었고, 1999년 경북오페라단을 경북 최초로 창단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사회에 음악으로 기여할 수 있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했죠. 이 일을 하면서 가끔 오지를 찾아다니며 공연 할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 단계적으로 밟아 잘 닦여진 길을 걸어온 케이스와 거리가 멀다. 이런 것 강점이 될 수 있나.

“ 늦게 다시 시작한 음악은 유학 후에도 무대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며 청중과 완전히 교감하는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요. 대학에서 후진양성도 병행했으니 쉽지 않은 것은 당연했겠죠. 그 뿐만이 아니라 사설 오페라단을 운영하며 문화의 끝자락에서 차곡차곡 하나씩 필드에서 힘들게 쌓아올리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어요. 한마디로 남다른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제도권의 주어진 예산 아래 기획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밖에 없었어요. 기본 예산으로 두 세 배의 효과를 낼 오페라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이런 것이 큰 그림을 그리는데 분명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오페라단을 이끌며 특히 보람을 느끼는 때는 언제입니까.

“오지 마을의 어느 아이가 저희 공연을 보며 아티스트의 꿈을 키우는 것을 보고, 오페라를 처음 본 시골 할머니들이 제 손을 꼭 붙잡고 ‘이런 공연을 생전에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실 때 예술가로서 기획자로서 성취감과 소명을 느끼죠. 좋은 콘텐츠를 생산해 수준 높은 메니아들에게는 고급 문화 향수권을 제공하고, 문화소외계층이나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며 제가 가진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 저야말로 행운아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 극장장으로 예술행정과 예술경영을 해오며 평소 기본 철학이 있다면.

“극장은 청중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문화를 공급하는 순기능 역할을 하고, 그로부터 감동을 받은 청중은 더 많은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문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됩니다. 저는 극장과 청중 사이에서 그런 매개체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신이에요. 이런 진정성과 열정적인 마인드로 문화를 생산하면 청중들이 먼저 느낀다는 것을, 극장장으로 문화재단 대표로 그리고 경북오페라단 활동에서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소신으로 역할을 해 나갈 것입니다.”

-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이셨던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영랑 김윤식 시인이 조부님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끼를 물려 받으신건가요.

“저희 조부께서는 전문가 이상으로 동서양의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고 즐기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당한 유지로서 많은 음악인들에 메세나를 실천하신 점과 일본 공연온 당대 최고 테너 엔리코 카루소를 보기 위해 전답을 팔아 다녀오실 만큼 문화예술을 사랑하신 분이셨고, 독립만세 사건으로 대구형무소를 출옥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음악대학에 진학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기도 하셨지요. 예술에 대한 조예도 깊으셨지만,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정의감을 가진 호방한 분이시기도 하셨죠. 집안 어른들께 제가 조부님을 많이 닮았다고 들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인 딸은 서울예고와 유학을 다녀와 전문예술가의 길을 가고 있고, 아들도 고려대학교 졸업 후 동경대에서 인문학 박사과정으로 전공하고 있으니 집안의 문화예술 DNA가 이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 앞으로 꿈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news/photo/first/201310/img_110574_1.jpg"예술인들을 위한 지원과 복지정책을 끌어내 예술인들의 삶을 보다 안정적으로 만들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최종 바람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사회에 환원하는 선순환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 불특정 다수의 많은 시민들의 삶이 문화로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제가 꿈꾸는 삶입니다./news/photo/first/201310/img_110574_1.jpg"

황인옥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