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시론> 용서와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
<팔공시론> 용서와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
  • 승인 2009.05.2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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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로 (논설위원)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과 싸우면서 그 현실의 잘잘못을 꾸짖던 사람이었다. 삶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고 가진 것 비록 없어도 그 전부 내 던져서 희망 있는 세상을 열어보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내보인 마지막 몸짓은 죽음이었다.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놀라움과 충격 속에서 깊은 슬픔에 젖어 있다.

봉하 마을로 조문 갈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다. 길을 나서 한 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는 가까운 마을이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망이 길을 막았다. 만나서 반갑게 인사할 방문길이라면 금방 달려갈 수도 있지만 죽음의 의미를 새기는 길이라서 내키지 않았다. 점차 원망이 잦아들면서 마음도 바뀌었다. 지인들과 함께 새벽에 길을 나섰다.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3시였다. 가족이나 동료들과 함께 찾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얼마 들어가지 못하고 길게 줄지어 늘어선 조문객 행렬을 만났다. 가로등조차도 고장 나서 마을 주변은 깊은 어두움에 둘러 싸여 있었지만 군데군데 놓여있는 촛불 때문에 그런지 어둡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두세 걸음 걷고는 멈추었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하기 두 시간. 어둠 속에서 길고 지루한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었다. 함께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슬픔과 분노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점차 대화의 내용은 일상 삶으로 돌아왔다. 어디서 왔는지 서로 묻고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기도 했다.

이 줄이 언제나 줄어들까 궁금했다. 나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래 기다릴 것을 각오하고 왔기 때문이다. 그때 어린 아이들이 행렬 가운데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른들은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생각도 하고 주변사람들의 대화도 듣고 거기에 동참하기도 하지만 어린이들은 어른들 틈새에서 그저 엄마 아빠 옷자락만 잡고 가고 있을 뿐이었다. 애기가 있는 분들은 앞으로 먼저 가라고 해도 함께 줄서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만사를 제쳐놓고 온 조문길인데 서둘러 갈 만큼 바쁜 길도 아니고 먼저 간다고 즐거울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 산 너머로부터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있던 사람들 사이에 이제 대화는 거의 없어졌다. 차분한 마음으로 각자 자신들의 종교와 신앙에 따라 망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좋은 곳으로 가서 영원히 평화로운 안식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조문객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짧게나마 방명록에 남겼다.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받아들었다. 짧고도 길었던 행렬 속에서의 피곤함도 잊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왔고 세상에서 하는 일은 모두가 달랐지만 이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아픔과 슬픔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국화 한 송이를 단에 올리고 짧은 묵념과 기도가 모두였지만.

조문을 마친 사람들은 음료수나 간식거리를 받아 하나 둘씩 사저를 지나 봉화산 부엉이 바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새벽 5시를 막 넘긴 시각이라 마을 주변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꽤 쌀쌀하였지만 조문객들은 금방 떠나지 않았다.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고 둘레둘레 모여서 앞날을 걱정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길가에 앉아서 피로를 달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을을 떠나 밤새 줄서서 기다리던 그 길을 되돌아 나왔다. 만장기가 줄지어 세워져 있는 길을 따라 나오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참으로 평화로운 밤을 보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이제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소망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었다.

서로에 대한 끝없는 원망과 분노는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뿐이다.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려면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 세상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묻는 것은 바보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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