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칼럼> 존엄사냐, 안락사냐
<대기자 칼럼> 존엄사냐, 안락사냐
  • 승인 2009.05.2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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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객원 大記者)

몸이 아픈 사람들이 병원에 가지 아프지도 않은 사람이 애써 병원에 갈 리 만무하다. 그런데 아픈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줄줄이 병원에 누워 지낸다. 말도 하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의식도 없다. 이른바 식물인간이다. 식물인간이라는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살아있으면서도 초목처럼 아무런 의사 표현을 못하게 되었으니 식물인간이라는 표현이 듣기에는 거북해도 환자의 현상을 잘 나타낸 말이다.

이런 환자들이 병원마다 넘쳐난다. 뇌졸중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뇌가 손상을 입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 중에는 5년이나 10년 후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하는 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오랜 고생 끝에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된다. 물론 뇌사 판정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도 `사망’으로 인정하여 심폐소생술 같은 장치를 제거해 왔다. 문제는 뇌사에 이르진 않았지만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의학적 판단이 내려진 경우다.

이런 환자들은 산소 호흡기를 장착하고 영양제를 주사하여 끈질긴 삶을 이어가게 만든다. 가족들도 속수무책이다. 병원에서는 현행법을 위반해가면서까지 생존 장치를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1년이고 10년이고 환자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놔둔다.

의사나 가족이나 모두 괴롭다. 환자 본인은 아무 의식도 없으니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다. 막대한 입원비를 부담해야 하는 가족들은 경제적인 타격이 크고 났지 않는 환자를 끌어안고 가야하는 병원에서도 본의 아니게 수가(酬價)만 챙기게 된다.

가족들은 생명장치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입원비는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환자가 소생할 길은 없으니 금전부담이 큰 가족들은 울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게 되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큰 대학병원에서는 입원 당초에 생명장치를 하지 않거나 영양 주사를 놓지 않는 방법으로 환자의 편안한 죽음과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는 편법을 써왔다.

이것이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법과 현실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빚어냈지만 의식을 잃어버린 환자를 두고 일어나는 복잡다기한 문제는 오히려 피하게 되었다. 이번에 대법원에서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하나의 예시(例示)를 내놓은 것은 오래 끌어오던 사회적 이슈의 중대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자칫하면 인권유린의 덤터기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주마다 법이 달라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하느냐 여부를 법원이 판단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이 문제가 법에 호소되었고 1,2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을 받게 된 것이다. 77세 김모씨의 연명장치를 제거해달라는 가족들의 제소는 승소로 끝났다. 그러나 대법원의 조건은 까다롭다. 대법관 13명 중 9명이 동의하고 4명은 소수의견으로 반대했다.

그들은 “삶의 최종단계에서도 환자 자신의 자율적 결정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존엄사를 인정하면서도 그 기준을 확실히 밝혔다. 첫째 환자의 의식 회복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 둘째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생체기능의 상실을 회복할 수 없을 때다. 셋째 환자의 신체 상태에 비추어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한 경우다.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했을 때만 생명장치를 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사망이 임박했다는 판단은 전문 의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소견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정이다. 사람의 생명을 끝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대법원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환자 본인의 명백한 의사표현이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과거의 행적과 발언을 통해 그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객관적인 자료, 환자의 평소 가족·친구 등에 대하여 한 의사표현, 타인에 대한 치료를 보고 환자가 보인 반응 등을 참고해야 된다고 밝혔다.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의사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불가능’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 것이 대법원 판결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또 한 번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종교적으로, 이념적으로, 사생관에서 모두 다른 국회의원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할 가능성은 어느 법보다도 많다.

다만 참으로 귀중한 생명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나 취향에 따른 토론보다는 범사회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에게 안락사(安樂死)의 멍에가 지워져서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엄사와 안락사는 최종의 결과는 같을지라도 인간의 `마지막’에 대한 표현으로서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존엄사는 자발적 의사의 표현이요, 안락사는 피동적 의사로 구분할 수 있다. 존엄사를 택한 환자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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