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의 현장 동경 YMCA를 찾아
2·8독립선언의 현장 동경 YMCA를 찾아
  • 승인 2013.12.0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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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객원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중국 상해를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임시정부 청사와 홍구공원을 찾는다. 3·1만세운동 이후 선포된 임시정부는 모두 4개가 있었으나 모두 상해임시정부로 합해졌고 가장 오랜 세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모태 역할을 했던 곳이다. 낡고 좁은 청사였지만 그 곳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조국광복의 꿈을 되살렸다.

홍구공원은 지금 노신공원으로 개명되었지만 윤봉길의사가 일본 천장절 기념식장에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여 수많은 요인을 폭사시켰던 역사적인 장소다. 우리가 이 두 곳을 열심히 찾아가는 것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선열들의 발자취나마 어렴풋이 찾아보기 위해서다. 일본 동경 한복판에도 독립운동의 현장이 있다. 그것도 3·1운동을 촉발시킨 2·8독립선언의 현장이다. 일본에 갈 때마다 한번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정이 맞지 않아 아쉽게 그냥 돌아왔는데 이번 범사연 주최 한일평화 심포지움에 참여한 일행이 11월17일 이 곳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나는 현장에서 일장 연설을 통하여 2·8독립선언에 대한 해설을 하게 되었다.

“1919년 2월8일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학생 600여명이 모였다. 당시 일본의 강점지(强占地)가 된 조선에는 대학이 없었다. 조선왕조에서도 유학(儒學)을 가르치는 성균관이 있었지만 근대적 의미의 대학은 아니었다. 따라서 중학을 졸업한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려면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고 사각모를 쓴 대학생이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엘리트였던 것이다. 개중에는 신문팔이 등으로 고학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비교적 가정형편이 넉넉한 부잣집 자식들이었다. 그들이 대학을 나오면 장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거의 전부가 2·8독립선언에 동참했다. 재일 유학생들은 구한말부터 조선유학생 학우회, 조선기독청년회 등 단체를 조직하고 애국개화운동의 선봉에 서왔다. 웅변대회, 토론회, 강연회, 졸업생 축하회, 신입생 환영회 등으로 끈끈한 정으로 뭉쳐 있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의식화운동을 벌여온 것이다.

때마침 1918년은 세계 제1차대전이 막바지를 향하여 달려갈 때다. 신흥대국이었던 미국 윌슨대통령은 종전 후 개편될 세계질서에 대한 평화원칙 14개조를 발표했다. 연초 1월이다. 민족자치를 보장해야 한다는 대원칙은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국가들에게는 복음이었다. 여기저기서 꿈틀거렸다. 연말 11월에 종전이 선언되자 동경 유학생들은 재빨리 해가 바뀐 1월6일 동경 YMCA에서 웅변대회를 갖고 독립운동을 결의하게 된다.” 이미 작성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동경주재 각국대사관, 일본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과 언론사 등에 배포하고 2월8일 오후 2시 동경 YMCA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한다. 독립선언문은 이광수가 작성했으며 백관수가 낭독했다. 현상윤, 송계백, 김도연, 서춘, 이종근, 최근우, 김철수, 김상덕, 윤창석, 최팔용 등 12명의 대표학생이 서명했다. 선언문 낭독 후 학생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시가행진에 들어갔으나 경찰에 포위되어 60여명이 체포되었다.

남은 동지들은 2월12일과 23일에도 히비야공원 등지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을 벌여 일본 언론계를 뜨겁게 달궜다. 이 선언문은 1. 조선은 4천3백년의 역사를 가진 자주민족이다. 2.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비인도적 만행정치로 조선민족을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했다. 3. 조선민족의 생존 발전을 탄압하고 일본인만의 번영을 누렸다. 4. 동양평화를 위해서 군국주의 침략자를 물리치고 국제연맹의 뜻에 따라야 한다. 5. 조선독립을 위해서 최후의 일인까지 피로써 싸우며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포한다.고 선언했다.

대학생이었던 그들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어른들조차 하지 못했던 애국거사를 해낸 것이다. 직후 3월에는 진급시험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미 자신의 안위와 입신에는 관심을 버린 애국 충정이 가슴에 서려 있었기에 아무 것도 두려운 게 없었다.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소식은 빠르게 국내에 알려졌다. 당황한 것은 기성세대들이다. 부랴사랴 종교계를 중심으로 모인 게 33인 민족대표다.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참여하여 육당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것은 그나마 2.8선언 후 한달도 못되어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2.8선언을 쓴 이광수와 3.1선언을 쓴 최남선이 일제 말에 친일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의 장으로 넘기거니와 이번 동경 YMCA를 찾았다가 깜짝 놀란 것은 그 건물이 ‘한국 YMCA‘가 되었다는 점이다. 원래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게 되자 한국 측에서 모금을 하여 낙찰 받은 쾌거를 이룬 것이다. 민주당 총재였던 이기택은 “당에서도 모금에 동참했다”고 회고했다. IMF때 장롱속의 금 부치를 서슴없이 내놓은 민족 아닌가. 동경 가는 기회가 있으면 또 찾아가 2·8박물관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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