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4.19’ 뒤에는 반드시 `혁명’을 붙여야
<대구논단> `4.19’ 뒤에는 반드시 `혁명’을 붙여야
  • 승인 2009.01.1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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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장 )

1960년 4월19일! 이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넋을 놓고 명상에 잠긴 일이 있다. “아니, 4.19혁명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고 혼자서 큰 소리로 외쳐봤지만 모른다는 대야 무슨 뾰쪽한 대책이 없다. 모두 다 알 것 같은데 모르는 젊은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데 고민이 있다.

이 날 한국의 젊은 대학생들은 너도나도 일어나 “자유당 독재정권 물러가라” “3.15부정선거 다시하자” “기성세대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주류는 대학생이었지만 나이 어린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도 가세했으며 길거리의 신문팔이, 넝마주이, 구두닦이들까지도 모두 들고 일어났다.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이승만, 이기붕 라인을 형성한 자유당정권은 부정선거를 통하여 후계구도를 확실히 다져놨다. 이에 저항하고 나선 것은 당시의 야당이었던 민주당도 아니고 일반시민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움에 목말라하던 학생이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하여 준법정신을 일깨웠고 자유와 정의의 지고지순함을 믿고 있었기에 사회적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기본을 갖추고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함성은 터져 나왔다. 민심을 이반한 자유당은 국민의 안중에서 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대가 지나는 길거리에는 먹을거리와 물동이가 잇대었다. 시민들의 격려는 데모대의 용기를 배가시켰다. 일반시민들은 앞장을 설 수는 없었지만 데모대의 뒤꽁무니를 지키며 행여 불상사가 생겼을 때 응원자 구실을 자처했다.

서울에서는 국회의사당을 거쳐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경무대(현 청와대)를 향하여 진군했고 각 지방도시에서는 도청이 목표였다. 노도처럼 밀려들어오는 시위대의 물결은 누구의 힘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거대한 용트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는 불어났다. 모든 상점들은 철시한지 오래고 시위의 열기는 전국을 휩쓸었다.

공포에 질린 자유당정권의 핵심세력들은 줄행랑을 쳤지만 대통령을 지켜야 할 경무대 경호경찰대는 결국 실탄발사로 응수하게 된다. 4.19혁명의 요란한 종소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조용히 물러가지 않고 국민을 향하여 총을 쏜 이승만은 전 세계민의 분노를 샀다. 광복 후 초대 대통령이 되어 한 때 `국부(國父)’로 치켜세워졌던 이승만의 단말마적 행태였다. 피를 본 데모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승만의 하야를 주장했다.

4월19일 이후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은 학생데모는 매일처럼 거리를 누볐고 급기야 대학교수들의 궐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당시 대학교수들은 은인자중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 사태가 계속되어서는 애꿎은 학생들의 희생자만 늘어날 것으로 판단하여 몸소 데모에 나선 것이다. 물론 그들의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국의 교수를 대표하는 성격이 있었고 학생들과 똑같은 주장과 소신을 밝힌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승만대통령 하야’를 건의한 것은 백미였다.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며 열기가 식기만을 기다렸던 이승만은 이제 더 이상 뒤로 빠질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4월26일 그는 `대통령 사임’을 발표하고 이화장으로 퇴거했으며 허정 권한대행체제가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경과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4.19혁명을 진짜 `혁명’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혁명의 주체들인 학생세력이 정권을 인수하지 않은데 기인한다. 자유당이 무너지고 정권을 잡은 세력은 민주당이지만 그들은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를 자파세력 부식에만 몰두하다가 신파 구파로 각기 분당함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배신한다.

그것은 곧바로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를 불러온다. 5.16정권은 5.16을 `혁명’으로 부르며 4.19혁명은 `의거’로 낮춘다. 이 수모 끝에 민주화쟁취 이후 다시 `4.19혁명’으로 본명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수유리에 있는 `국립4.19민주묘지’에는 `혁명’ 두 글자가 빠져있다.

지난 1월 2일 이 묘지에 국가보훈처장의 참배가 있었다. 4.19혁명단체 회원들도 다수 참석했다. 참배가 끝난 후 돌아가는 보훈처장에게 김칠봉 유공자가 다가섰다. “보훈처장님, 4.19민주묘지에 `혁명’ 두 글자를 추가하도록 해주십시오.” 그가 한 말은 이 한마디뿐이다. 처장으로부터 확답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뜻하고 있는 것은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4.19혁명을 내세워 자신의 투쟁경력으로 자랑하는 사람 중에도 흔히 `4.19’라고만 호칭한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젊은 대학생들조차 4.19혁명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처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4.19혁명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4.19혁명을 헌법정신에 입각하여 제대로 부르고 이를 선양하는 운동을 전개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칠봉의 `4.19혁명민주묘지’ 제안은 큰 의미가 있으며 내년 4.19혁명50주년 기념일 이전에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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