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렌즈를 통해 일상과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다
그의 렌즈를 통해 일상과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다
  • 정민지
  • 승인 2014.06.0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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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사진작가 박창모

친구들 유혹에 빠져 얼떨결에 사진과 지원

순탄치 않은 취업…능력 알아본 계명대서 채용

대학 행사 등 반복된 촬영 속 작품 향한 목마름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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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학교 홍보팀 재직중 경주 양동마을을 주제로 한 개인전과 대구경북의 자연을 담은 ‘우리 땅 우리 삶’ 사진집을 발간한 박창모 작가.
박창모(41) 작가는 ‘사진은 기록’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기록.’ 무엇인가를 경험한다는 것이 그 경험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것과 동일해져 버린 오늘날, “모든 것들이 결국 사진에 찍히기 위해 존재하게 되어버렸다”는 한 평론가의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매일 적게는 한 두장에서 많게는 수백장의 사진을 찍는 현대인에게 사진은 일상의 기록인 것이 맞다. 최소한 ‘인증샷’만 봐도 그러하다.

누구나 기록할 수 있게 된 지금이야말로, ‘무엇’을 기록하느냐가 중요해 진 듯하다. 박 작가를 세상에 알린 기록(사진)은 지난 2010년 올해의 청년작가 초대전에 선정된 경주 ‘양동마을’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이곳을 무려 15년 간 ‘기록’했다. 그 다음이 우리의 산과 들을 누비며 이를 기록한 ‘우리 땅 우리 삶’ 사진 작품이다. 1년 하고도 반년을 이 작업에 몰두했다는 그는 작가 이전에 계명대 홍보팀 직원이기도 하다. 11년째 재직하며 한해 1천회 가량의 대학 관련 ‘기록’을 남기고 개인 작업도 이어가는 박 작가는 육안보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에 더 익숙할 것도 같았다. 사진작가의 드레스코드(?)와는 전혀 다른, 교직원같은 그의 첫 인상이 인터뷰가 끝날 즈음 사진에 푹 빠진 작가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 곳에 동화되자 사진이 시작됐다

사진과를 택하게 된 것은 친구들의 ‘꾐’이었다. 영화에 푹 빠졌던 10대 박창모 작가는 그의 말을 빌자면 “용기가 없어서” 진로를 전산 관련 쪽으로 잡았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사진과를 지원한다며 같이 넣어보자는 얘기에 버스 안에서 전산과 원서를 찢어버렸다는 그. 사진기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용감한 10대였다.

“당시 사진과를 가려면 ‘감성테스트’라는 것이 있었는데 다행히 그 시험이 없는 곳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결정적 순간’이었죠.”

박 작가의 사진이 시작된 지점은 군대를 갔다오고 복학한 후, 사진 작업을 위해 경기도 가평 꽃동네를 찾고 나서다. 역시나 사진과를 추천했던 그 친구들이 음성의 꽃동네에서 한 달여간 숙식하며 다큐 사진을 찍고 와 박 작가에게도 가보라고 한 것.

“무작정 갔어요. 혼자 기차, 버스 갈아타고 대구서 가평까지 갔죠. 가서 꽃동네 신부님께 사진찍으러 왔다고 했더니 사진기를 두고 우선 4층 할아버지 숙소에서 머물며 일하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사진을 찍겠다는 당초 목적과는 상관 없는(혹은 없다고 생각되는)봉사활동을 하게 됐다.

“100여명의 할아버지들을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매일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어서 힘들고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더라구요.”

한달 계획 중 딱 절반이 지났을 무렵, 박 작가는 ‘똥독’에 올라 이삼일을 드러누웠다. 아프고 서러운 마음에 그는 “친 할아버지가 아프다”며 신부님께 거짓말을 하고 그날로 짐을 싸 대구로 내려왔다. 대구에 내려와 꽃동네 작업을 추천했던 친구 중 한 명을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창모, 너라면 버틸 줄 알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봤어요. 술자리를 파하고 집 앞에 도착했는데 대문 밖으로 여동생의 웃음소리와 부모님 목소리가 들리더라구요. 도저히 문을 열지 못하겠다 싶어 그대로 뒤돌아 가평행 기차표를 다시 끊었어요.”

박 작가가 처음 가평에 갈 때 챙겨간 필름은 50통 이었다. 고스란히 가방 안에 들어 있는 필름을 바라보며 그는 다음날 오전 7시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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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구경북 지역을 비롯 전국을 돌며 기록한 5만여점의 사진을 추려 발간한 /news/photo/first/201406/img_132800_1.jpg'우리 땅 우리 삶/news/photo/first/201406/img_132800_1.jpg' 사진집 중 울진군 서면 불영계곡 풍경.
“다시 꽃동네로 돌아가니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바뀐 것이 느껴졌어요. 못 버티고 돌아간 대학생 중에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사진 한 장도 안 찍어도 좋다 싶었죠. 그때부터는 꽃동네 생활이 즐겁기만 했어요. 말 안듣는 할아버지들께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봉사만 하다가 간다는 마음으로 즐겼더니 어느 날 신부님이 부르시더라구요. 앞으로 집에 갈 때까지 일하지 말고 사진만 찍으라고.”

사진을 찍으라는 ‘허락’에도 그는 “일은 일대로 하면서 틈틈이 찍겠다”고 했단다. 매일 보는 그 곳의 풍경에서 빛이 좋은 시간, 꼭 남기고 싶은 공간과 구도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 일을 즐기니 언제 짬이 나는 지도 파악이 됐다고.

“마지막 3일 동안 14통 찍었어요. 한달 간 작업한 친구들 만큼 찍었죠. 근데 뭐랄까. 변한 게 느껴졌죠. 아는 얼굴, 아는 공간을 찍는다는 것. 사진 전공이다 보니 일반인보다 구도는 잘 잡았던 것 같은데 이 경험으로 마음과 느낌이 들어간 사진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어요. 남들이 말하는 좋은 사진, 감동이 있는 사진이 이런 게 아닐까 했죠.” 찍어야 하는 대상을 넘어 피사체에 동화되어 버린 것, 박 작가는 “그 때부터가 사진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곳을 느껴버렸다”고 표현했다.

◇사진에 대한 목마름

학교를 다니면서 박 작가는 컴퓨터 그래픽 공부를 시작했다. 초창기 컴퓨터 그래픽의 세계를 알게 되면서 좋아하던 영화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사진 작업도 이어갔다. 그러다 26살에 취업한 곳에서 3년 동안 고생한 그는 29살에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3D그래픽을 배우는 것.

“이쪽 계통이 워낙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여성들이 꺼려하기에 일부러 택했어요. 재미있기도 했구요. 1년 6개월 정도 학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단축키를 이용해 작업할 때면 손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까지 들었죠.”

2002년 월드컵 당시 선수들과 응원하는 모습들을 3D로 만들어 주목을 받기도 하고 세간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포트폴리오도 3가지 버전으로, 업종에 맞게 만드는 등 피나는 노력을 했다. 처음에는 증가하는 수요에 맞춰 게임회사에 들어가려는 마음을 먹었다.

“50~60군데 정도 원서를 넣어본 것 같아요. 근데 모두 다 떨어졌죠. 나이 제한에 걸린 거예요. 워낙 트렌디한 시장이다보니 30살이 된 제게는 기회조차 없더라구요.”

벌어놓은 돈은 점점 까먹고 퀵서비스라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계명대 홍보팀에서 직원을 뽑는다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원서를 넣었어요. 사진과 멀티미디어 관련 직원을 따로 채용하지 않다가 2003년 공고가 났었죠. 거짓말같이 스펙보다는 제 실력을 보고 같이 일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번번히 실력은 있지만 나이나 스펙에서 밀렸던 터라, 그때 기분은 말로 할 수 없어요.”

그렇게 시작한 홍보팀 직원, 박 작가는 연간 700~1천건 가량의 사진을 찍었다. “대학 관련 보도자료, 광고, 풍경, 각종 행사 등 사진이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 함께 했죠. 그런데 매일 찍는 사진인데도 이상한 갈증이 생기더라구요.”

2008년 무렵, 사진 작업을 하고 있는 선배를 수소문해 찾아 갔다. “1년 6개월 간 대여섯번 정도 만났어요. 한번 만나면 밤새 이야기를 하다보니 ‘오늘은 여기서 끊고 다음에 더 얘기하자’고 할 정도였죠. 매너리즘에 빠지고 싶지 않아 않았어요.”

그해 여름부터 박 작가는 개인사진작업을 ‘재개’했다.

◇양동마을, 그리고 우리 땅 우리 삶

양동마을 사진전도 그렇게 시작됐다. 1995년 어쩌다 찾게 된 양동마을에서 모든 것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보존돼 있는 모습에 박 작가는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렀다. 이후 정기적으로 양동마을을 찾아 마을 주민들을 담았다. 1주일씩 머물기도 하고 매주 찾아갈 때도 있었다. 사진 작업을 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기보다 자주 가고 자주 만나다보니 정도 들고 그 마을에 젖어들었다.

“마을 어르신 중 이제는 사진으로만 남은 분들도 계세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아는 분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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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photo/first/201406/img_132800_1.jpg'2010 올해의 청년작가 초대전/news/photo/first/201406/img_132800_1.jpg'에 선정된 박 작가의 /news/photo/first/201406/img_132800_1.jpg'그들의 이야기-양동마을/news/photo/first/201406/img_132800_1.jpg'전 사진 작품.
이 작업으로 박 작가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주최하는 ‘2010 올해의 청년작가 초대전’에 선정돼 생애 첫 개인전 ‘그들의 이야기-양동마을’을 열었다. 운이 좋게도 개인전이 열리기 직전,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박 작가의 작품이 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인 조명을 받게 됐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 작가의 작품을 본 계명대 신일희 총장은 대구·경북지역의 자연과 사람에 대해 알려줄 만한 사진집이 하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박 작가에게 “1년 간의 시간을 줄테니 마음껏 우리의 산과 들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어 보라”고 요청했다.

200여쪽에 달하는 ‘우리 땅 우리 삶’은 그렇게 탄생했다. 신 총장이 준 1년의 시간에 6개월을 더 보태 자연에 작가만의 덤덤하면서도 따뜻한 색채를 입혔다.

“5만장을 찍었어요. 그 중 650장을 고르고 또 은사님과 선배들과 함께 이틀간 10시간에 걸쳐 150장을 추려 완성했어요. 찍는 과정보다 고르는 과정이 더 힘들었죠.” 사진집에 실린 우리나라 1세대 사진 평론가 김승곤 교수의 글도 직접 연락하고 부탁해 받았다.

김 교수는 “경관 십 년, 풍경 백 년, 풍토 천 년”이라며 “부모와 그 부모들이 사랑했던 대지의 풍경과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집”이라고 소개했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

현대사진영상학회 전시분과 위원이자 사진기록연구소 운영위원인 박 작가는 사진이 가진 ‘기록’이라는 속성에 충실하고자 한다. 대학부터 20여년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도구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 본질은 ‘기록’에 있었던 것 같다는 그.

“사진기의 탄생은 기록을 위해서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작업이야 말로 역사성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현대 도시의 풍경을 기록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스마트폰에 저장해놓은 작업 주제와 아이디어 메모를 보여줬다.

사진집에 들어갈 짧은 글을 쓰기 위해 수개월간 글쓰기 특훈을 받을 정도로 배움의 열정이 넘치는 그다. 공부에 대한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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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울릉도에서 /news/photo/first/201406/img_132800_1.jpg'우리 땅 우리 삶/news/photo/first/201406/img_132800_1.jpg' 사진집을 위해 작업중인 박창모 작가.
“사진이든 어떤 것이든 기술에 콘텐츠를 더하려면 인문학 공부가 필수인 것 같아요. 요즘에는 기록학 분야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구요.” 훗날 여유가 생긴다면 박 작가는 꿈이 있는 작가들을 위한 무료 대관 갤러리도 열고 싶다고 한다.

“작가가 된 이상 사진 작업은 평생 해 나갈 생각이에요. 쉽게 안 버리고 잊지 않고 덧붙여 가며 계속 하는 것, 그냥 저는 그렇게 생겨먹은 것 같아요.”

정민지기자 jmj@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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