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질과 삽질
대학살이 지나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동작동 산기슭
군사분계선 철조망
탱크가 지나간 논밭머리
온갖 쓰레기더미 밑에서도
이 땅의 상처와
마을 사람들의 주검을
푸른 요로 덮으며
열심히 일을 한다.
나는 풀이다.
언제나 깨끗한 새살이다.
크게 소리치듯 소리치듯
햇빛과 수분과 맑은 공기를 찾아서
온몸으로 온몸으로
일어서고 있다.
(이하 생략)
강원 춘천 출생. 중앙대학교 국문과 졸업. 1974년 `시문학’에 추천돼 등단. 20세기 명작 소설 가운데 하나인 `폭풍의 언덕’ 에는 들풀이 등장한다. 매서운 폭풍이 휘몰아칠 때 몸을 낮춘 사물만이 무사히 살아남는다.
그런 생존의 조건 가운데 몸을 낮춘 풀들이 무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풀은 전쟁의 상혼과 비극적인 인간의 주검을 덮어줄 뿐 아니라 언제나 `깨끗한 새살’로 되살아난다. 존엄한 인간의 목숨이 한포기 풀보다 미약한 것은 바로 `새살’로 되살아날 수 없는데도 슬픔이 있다. 이 시에서 보듯 인간은 누구나 풀처럼 `온몸으로 일어서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일기(시인`문학예술’발행인)
저작권자 © 대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