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들이 점령한 공공도서관 시청각실
노숙자들이 점령한 공공도서관 시청각실
  • 천혜렬
  • 승인 2009.01.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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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대구 서부도서관 시청각실.

10여명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도서관 측이 마련한 무료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30~40대로 보이는 이들에게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피부에 짙은색의 남루한 옷을 입고 떡진 머리카락은 모자나 비니로 감춘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노숙자 풍이라는 것.

영화상영시간에 맞춰 시청각실을 찾은 사람은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차림새에 바지 뒷주머니에 신문지를 돌돌 말아 꽂고 입장했다.

이들에게 상영 중인 영화 ‘왕의 남자’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엉덩이를 빼고 앉은 이들은 영화 상영 시작과 동시에 코까지 골며 이내 잠이 들었다.

312여석 규모의 시청각실은 레이저빔 프로젝터에 의한 634㎝(250인치) 대형 멀티스크린을 갖추고 있지만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다.

“점심 먹고 종종 여기 와서 쉬었다 간다”는 한 노숙자는 “추운 날씨에 마땅히 갈 곳이 없는데 여기 오면 따뜻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인기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간 두류공원 내 두류도서관 시청각실도 상황은 마찬가지.

100여석이 마련된 지하 시청각실에도 남루한 복장의 노숙자들과 갈 곳 없는 노인 등 20여명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조명이 들지 않는 무대 앞자리를 차지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상영 중인 영화는 ‘혈의 누’.

개봉 당시 잔인한 살인장면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이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시청각실 맨 뒷좌석에 앉아 애정행각을 벌이는 철없는 10대 남녀의 속삭임도 이들의 잠을 깨우지 못했다.

공공도서관의 영화상영 행사는 주민들에게 양질의 영화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당초 취지를 무색케 하며 일반인들의 발길을 잡지 못하고 있다.

취업준비생 이모(32)씨는 “책을 보다가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시청각실을 찾았다가 잠자고 있는 노숙자들을 보고 그냥 나온 적이 몇 번 있다”며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해 보려고도 했지만 코고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려 집중해서 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공공도서관 시청각실이 노숙자들의 쉼터로 전락하고 있는 모습이다.

도서관 입장에서도 일반인과 비교해 이들이 ‘반갑지 않은 손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내쫓을 수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한 도서관 관계자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갈 곳 없는 노숙자들이 영화상영 시간에 맞춰 몸을 녹이고 간다”며 “영화상영이나 별도의 행사가 없을 때는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노숙자들이 시청각실을 찾는 시간이 한정돼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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