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
버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
  • 승인 2014.09.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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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대구지방환경청 홍보팀장, 수필가
시원시원하게 일처리를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몸으로 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왜소한 체격에 근력이 적은 탓도 있겠지만,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을 버리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사용해오던 싱크대와 옷장, 책상 등을 맞춤형으로 바꾸면서 도배와 장판도 새로 하기로 했다. 일주일 정도 여유를 두고 공사날짜를 잡게 된 것은, 구석구석 먼지처럼 쌓인 식기류와 의류, 책들을 하루 이틀 만에 정리하기는 엄두가 나지 않아 며칠을 두고 저녁마다 조금씩 비워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꼼지락꼼지락, 사흘째 싱크대 정리를 하던 날이었다. 오래된 반찬통들을 버리기로 작정을 하고보니, 정말 많은 양의 반찬통들이 버리는 쪽으로 모였다. 그중에도 유독 망설여지는 것이 있었다. 도자기류 식기세트였다. 열아홉 살 아들 녀석이 갓 돌을 지날 무렵,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한 조카들이 용돈을 모아 사주었던 것이다. 당시의 가격이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린 조카들이 꼬깃꼬깃 모은 용돈으로 사촌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예뻐 차마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오던 중이었다.

몇 번을 만지작거리다가 또 버리지 못하고 남게 될까봐 크게 용기를 내어 재활용품 수거용 포대가 늘어진 아파트 입구로 내려갔다. 완전한 세트로, 색깔마저 선명하여 더욱 버리기가 아까웠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자원순환의 아름다움, ‘아나바다’ 정신을 떠올리며 누군가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투명한 비닐봉투에 넣어 의류 수집함 위에 올려놓고 왔다.

책장을 정리할 때는, 이상하게 눈길이 가는 공책이 있어 슬며시 넘기다 깨알 같은 글씨로 써놓았던 일기를 발견했다. 기억은 순식간에 30년 전으로 달음질쳤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거리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들을 만나 크게 반가워하며 호들갑을 떨던 장면이 필름을 돌리듯 세세히 스쳐갔다.

그릇이나 공책 하나 버리는 데도 이렇게 미련이 많은데, 새집으로 이사라도 하게 되면 그 일을 어찌 다 할까.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얽매이지 않고 단호하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짐이 가벼운 만큼 마음도 항상 가벼울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존경스럽다.

달포 전에는, 친정에 들렀다가 40년 전의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책 속에서 발견하고 한참이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작고 예쁜, 노란 민들레 두 송이. 그리고 사진 뒷면에 카메라 렌즈의 종류와 찍은 장소와 날짜가 적힌 가느다란 글씨. 책은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삭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진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버려졌다면, 사진에 얽힌 추억의 편린들도 함께 버려졌을 것이 아닌가.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별 것도 아닌 그릇이나 공책, 사진 등이 모두 그렇다. 손때가 묻은 그것들을 볼 때마다 어린 조카들의 예쁜 마음과 친구들과 함께 나눈 즐거웠던 시간과 사춘기 소녀의 센티멘털리즘이 고루 섞여 삶의 원동력이 되고, 정신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연장을 잘 버려야, 훌륭한 목수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선뜻 버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아직은 쓸 만하다는 핑계로 자꾸 서랍이나 보관함의 안쪽으로 밀어 넣다보니 정리할 기회는 점점 멀어지기만 한다.

버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간직해야 할 물건은 따로 보관장소를 마련하고, 오래된 물건일수록 눈에 잘 띄는 곳에 두는 것이 옳겠다. 선입선출(先入先出)의 규칙에 따라 지난 것을 먼저 버릴 수 있도록 말이다. 정리를 하는데, 물건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보만능의 시대, 복잡한 머릿속에도 오랜 기억을 켜켜이 쌓아두기보다 신선한 공기를 자주 불어넣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떤 일을 추진하거나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일정한 수준의 정리는 반드시 필요하리라.

요즘은 매일 저녁 한두 가지씩 버릴 것들을 찾아내는 훈련을 하고 있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나 해가 지나도록 단 한 차례도 찾지 않은 물건이 있다면, 뒤돌아보지 말고 정리하는 습관을 길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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