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연산군의 소통 부재
<대구논단> 연산군의 소통 부재
  • 승인 2009.08.0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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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흥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

최근 여러 매체에서 정치, 사회, 그리고 연예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인기투표를 많이 실시한다. 가장 사랑(혹은 싫어)하는 현역(혹은 역대) 경제인, 대통령, 연예인 등을 조사 발표한다. 조사 결과는 물론 사람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중들의 공통된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조선시대 왕들을 평가한다면 어떠할까? 물론 사람들 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성군이라면 세종과 성종이, 폭군이라면 연산군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세종의 경우 당대 명재상이라 불리는 황희·맹사성과 더불어 국정 전반을 의논 결정하였다.

또한 당상관 이하의 관료들을 불러 정치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윤대(輪對)제를 시행하였는데, 이 경우 자유로운 의견 제시를 위하여 왕과 독대(獨對)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관을 배석하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제도와 정책은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시행하고자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여러 제도의 시행 역시 오랜 시간을 두고 여론을 수용하면서 시행하였다. 그 예로 당시 토지세는 경차관(敬差官)이 생산 정도를 보고 직접 세금을 매겼지만 과도하게 책정,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에 국가에서 토지 비옥도와 당해 년 흉풍에 따라 세금을 좀 더 합리적으로 거두는 공법(貢法)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급박하게 시행하였을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의논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실시 논의는 세종 초부터 있었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세종 12년에는 고위관료에서 농민까지 수십 만 명에게 문의한 후 이를 연구, 시험 실시 후 세종 26년 확정하였다.

성종 역시 유교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신진 사림들을 등용하여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병조의 전랑과 3사의 언관(言官)직에 배치하여 의정부와 6조를 장악한 훈구세력을 견제하였다. 물론 사림들은 여론을 통하여 훈구세력의 잘못을 고발하였다. 즉 상하 서로 견제할 수 있는 공존의 정치를 추구하였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연산군에 대한 설명을 보면,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리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중략>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

연산군에 대한 이미지는 TV 사극이나 각종 소설, 영화 등에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산군을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연산군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연산군일기’이다.

그런데 이 책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공신들이 편찬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료(史料)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료를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학자들도 문제가 있다. 그 평가 기준이 너무 성리학적 기준으로 하여 중종반정 세력을 대변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여기서 연산군이 폭군으로 낙인 된 원인 중에 하나는 신하들과의 소통 부족이다. 대간들과의 소통 부족에 대한 기록은 초기부터 나타난다. 연산군과 대간들은 연산군이 여러 이유를 들어 경연에 나오지 않은 것, 자신의 부도덕을 건의한 환관 김순손을 유배 보낸 후 사형에 처하려한 사건, 외척 윤탕로가 성종의 상중에 기생과 동거한 것을 이유로 탄핵하자 거부한 사건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대립하였다.

이후 이러한 소통 부족과 대립은 사화로 이어졌다. 두 차례의 사화 이후 연산군은 신하들과 대화를 단절하고,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예를 들면, 연산군을 충심으로 간한 환관 김처선을 사형한 일이다. 여기에 대하여 신하들은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의금부(밀위청)을 통하여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거나 반대하는 기미가 보이는 자를 가두어 국문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성종과 연산군은 부자 사이로 풍류를 좋아하여 연회를 자주 여는 등 많은 점들이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성종은 정치를 운영함에 있어서 신하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들의 주장을 적절하게 수용하였다면, 연산군은 신하들의 주장이 자신을 견제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여 수용하지 않는 패도주의를 추구하였다.

왕권을 강화 시키려는 패도주의를 실행하였다고 하여 폭군으로만 매도 할 수는 없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성군으로 지칭되는 군주는 여론이 소통되고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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