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포기 않고 가면 새로운 희망 만들 수 있다”
“내가 포기 않고 가면 새로운 희망 만들 수 있다”
  • 최연청
  • 승인 2015.02.1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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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진 대구시장

시장-시민 사이 벽 허물고 진정성 있게 다가가고 있어

소통은 서로의 공감대를 높여가는것…인내가 필요해

일시적 낙오자들 ‘희망의 사다리’ 무너지지 않게 도움
/news/photo/first/201502/img_155822_1.jpg"권영진시장인터뷰9/news/photo/first/201502/img_155822_1.jpg"
“이제 시민들 속에서 대구의 희망을 봤다”는 권영진 시장. “‘시장 권영진을 신뢰하는’ 인간 권영진의 두려움이 가장 크다”고 그는 말한다.
권영진 대구시장이 작년 선거에서 당선된 후 시청 출입기자단과 첫 기자회견을 가지던 날 이야기다.

평소 잘 보이지 않던 이들까지 많은 매체의 기자들이 이날 오전 시청 상황실에 모였다. 새 시장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아 기자회견은 예정된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래도 기자들의 질문이 끝나지 않자 회견을 진행하던 대구시 대변인이 기술적으로 질문을 중단시켜야 했다. 많은 시청 출입기자 가운데 한 매체의 기자는 장애인이었다.

그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기자회견장에 들어왔다. 행사가 끝나고 기자들과 새 시장이 다함께 점심식사를 예약해 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식당의 예약석은 2층이었다.

식당 딴에는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받지 않을만한 넓직한 장소여서 2층에 넓은 자리를 준비했겠는데, 오르는 계단이 몹시 길고, 좁고, 가팔랐다. 휠체어를 탄 그 장애인 기자는 “난, 점심을 다른 곳에서 먹겠다”고 좋은 말로 얘기했다. 바로 그때였다.

권영진 시장이 갑자기 휠체어 뒷쪽으로 서더니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 휠체어 좀 함께 듭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주변에서 권 시장과 함께 식당으로 오르려던 시장실 비서진들과 대변인실 직원들은 혼비백산 했다. 갑자기 시장이 그 무거운 전동휠체어를, 사람이 탄 채로 들어올리자고 넝큼 잡아드니 놀란 것이다.

그냥 시켜도 될 것을, 본인이 먼저 ‘끙차’하면서 들어올리니 모두가 몰려들었다. 끙끙대며 대여섯 사람이 그 휠체어를 식당 2층까지 들어올렸다. 땀까지 흘렸다.

사람이 앉아있는 전동 휠체어를 높은 곳까지 들어올리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대개 생각일 뿐이지, ‘시장’이라는 문패를 단 채 그 생각을 바로 실천하는 것은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인가.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간발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시장이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팔을 걷어부치면서 제일 먼저 행동에 나선 일들을 몇 번이나 봤던가. 별로 겪어보지 못했던 광경인 것은 분명했다. 실행력, 추진력, 판단력, 실천력... 이런 단어들이 왔다갔다 했다.

/news/photo/first/201502/img_155822_1.jpg"권영진시장-당구로소통2/news/photo/first/201502/img_155822_1.jpg"
권 시장은 곧잘 주변 사람들과 당구를 치며 대화를 나눈다. 격의 없고 누구나와 편안하게 어울릴 수 있어 골프보다 더 제격이라고 말한다. 박현수기자
그로부터 7개월. 그는 대구시장으로서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서 좀체 볼 수 파격을 줄줄 선보여 왔다. 시민원탁회의라든지, 현장소통시장실 같은 소통의 행정방식은 물론 청사를 활짝 개방하고 축구하는 시장, 심지어 당구치는 시장으로도 자신을 알렸다. 정치인 권영진에 앞서 인간 권영진이 몹시 궁금해졌다.

물어물어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됨됨이를 알아본다. 모두가 엄지손가락만 추켜 세운다. 지난 10일 그를 만나봤다. 그의 마음엔 어떤 게 웅크리고 있을까. 도대체 무슨 생각들이 그를 특별나게 하는걸까.

- 금방 확대간부회의가 끝난 터라 그의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인다. 얼굴이 자꾸 붓는다고 한다. 툭 던져봤다. 당구, 왜 치십니까?

“글쎄요... (제가) 한 300점은 치죠. 다들 그렇잖아요. 저도 고3 시절 배웠어요. 신천동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는데, 하숙집 형이 당구장을 했어요. 밤에 당구장 청소도 해주고, 뭐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배우게 됐죠. 공인의 길로 가면서 흔히들 골프나 이런 것들은 시간도 많이 빼앗기지만, 누구나와 격의 없이 어울릴 수는 없죠. 그런데 당구는 그런 게 있는것 같아요. 생활 공간 속에서 누구와도 쉽게, 편하게 즐기고 어울릴 수 있어요. 요즘 나한테는 제격인 놀이고, 스포츠예요.”

- 친구들로부터 신망이나 응원이 대단하던데.

“사람이라는 게 희안하죠. 자신이 좋아해 주면 다른 이도 좋아하게 되죠. 내가 친구들을 좋아하고, 하니까...주변 친구들이 나를 시장 만들어 놓고 사적으로 덕보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오히려 제게 누가 될까 애써 자제해주는 것만 같아 고맙죠. 그냥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만 해줘요. 더 많이 날 도와준 친굴수록 내가 시장되고 난 뒤 오히려 연락을 더 안해요. 그래서 역으로 전 섭섭해요. 하긴 나도 그리 살아왔으니까요. 내가 어려울 때도 더 어려운 친구를 위해 나를 분발시키는 뭐 그런거죠. 그래서 대부분 친구들이 나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어요.” 굳이 본인을 대신할 수 있는 친구 한 두 명만 꼽아달라고 하니, 마음 속에는 있는데 지금은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이 섭섭해 할 것을 걱정하는 것 같다.

- 뻔한 질문. 친구가 중요합니까, 가족이 중요합니까. 아니,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뭔가요.

“허허.. 나는 공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소명을 다하는 것이 사실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다보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도리를 못해 미안해지죠. 제가 정치 길에 접어들고부터는 제 입에 ‘미안하다’란 말이 늘 붙어다녀요. 가족, 친구들에게요. 제가 대한민국 정치에 처음 발을 들여놓으려 할 때 아버지가 ‘지금 이 시대에서 정치하려면 일제시대 독립투사처럼 살아야 하는데, 니 그거 자신있나?’라고 물어서 그때 전 ‘정의롭게 살 거다’라는 생각에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런데 지나고서 보니 대한민국 300여 명의 국회의원들 중에 박수 받는 이가 사실 몇 명 없는 거예요. 그러나 그 한사람 한사람을 정치인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봉사와 헌신, 희생을 해야하죠. 내가 경험해 보니 가까운 곳에서부터 가족과 친구들이 그 많은 희생과 번민, 봉사를 합디다. 사실 공인의 길을 바르게 가려면 가족들에게 잘해주기가 참으로 어려워요. 집을 더 넓혀줄 여유도 없고 다만 밥만 안 굶게 할 만큼이죠. 친구들도 마찬가지예요.” 중요함의 비중이라, 이 엄중함을 말 한마디로 물으려 했으니 ‘참 어리석은 질문을 했구나’ 하는 자책이 잠시 든다.

/news/photo/first/201502/img_155822_1.jpg"권영진시장인터뷰/news/photo/first/201502/img_155822_1.jpg"
권 시장은 운동을 좋아해 정치인이 안 됐으면 체육선생님이 됐을 거라고 말한다. 축구는 물론 족구, 탁구, 농구, 테니스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현수기자
- 안동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지 않고 서울에서 출마한 것은 고향에서 정치를 할 경우 만들어질 본인을 중심으로 한 패거리 짓기 등 지역 분열을 우려한 때문이라던데, 또 고향인 대구에서 시장으로 출마한 것은 왜인지요. 진정성의 문제 아닙니까.

“대구시장이라는 자리는 국회의원과는 또 다른 영역의 문제죠. 서울에서 정치하면서 바라 본 내 고향 대구가 너무 어려워진 거예요. ‘누군가가 여기에 와서 총대를 매고 혁신을 통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있었고. 전 제가 그 짐을 짊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여러 사람들이 와서 적임자라며 권유했죠. 광역행정, 중앙정치의 경험은 익혔죠. ‘이걸로 대구의 새로운 희망과 혁신을 만드는데 나를 던지는 것이 내가 대구 출신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또다른 소명이다’라고 결심을 굳히게 된거예요. 이건 4년 내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선 이후 지금까지 제가 한 일은 시장(市長)의 분위기를 바꾸는 일에 불과해요. 지금까지 대구시장이 많은 일들을 시민들의 가슴으로까지 끌고가지 못했다면 그건 시장과 시민 사이에 두터운 벽이 있다는 말이죠. 저는 그 벽을 허물고 진정성 있게 대구시민들에게 들어가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 소통과 협치를 강조하시는데, 소통이 안될 땐 전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소통이라는 건 일방적으로 내가 내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죠. 말하면서 서로가 이해하고 공감대를 높여나가는 것이죠. 여기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대한민국의 소통은 아직 일방적인 전달만 있고 스스로의 변화를 않는 수준이예요. 나 역시 아직 멀었어요. 저더러 소통을 잘한다고 하는데, 소통은 6∼7개월로 결론이 안나요. 소통 시정은 기본으로 계속돼야 하는 일입니다. 일정기간 내 성과의 문제가 아니란 거죠. 이것은 꾸준함이 기본입니다. 지금 제가 시장이 되고 난 후 소통은 됐다는 얘긴 어불성설이예요. 저도 의아한 평갑니다.”

- 현재의 우리 지역, 개천에서 용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그가 지은 책 중에 ‘개천에서 용 만들기’라는 자서전이 있어서 물어봤다)

“지금요? 어렵죠. 우리나라 전체가 부모의 경제격차가 아이들 교육의 격차로 이어지고, 이것이 또 미래의 사회적·경제적 격차로 이어지는 답답한 사회로 가고 있어요. 불행한 사회죠. 정치와 행정의 역할은 일시적 낙오자와 패배자를 위해 승자와 앞서 가는 자들에게 룰을 지키도록 해주는 것이예요. 그래서 일시적인 낙오·패배자들이 재기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이래야 성숙한 민주주의로 갑니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재기할 수 있는 희망의 사다리가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겁니다. 빨리 복원돼야 해요. 그 역할을 제가 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현재의 대구, 현재의 우리나라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용 날 수 있는 개천물은 다 말라 버렸다’고 할 수 있겠죠.”

- 두려울 때나 두려운 것이 있습니까.

“아∼있죠. 나 자신이 제일 두려워요. 전 포기만 하지 않으면 성공한다고 보거든요. 전 대구시민들의 큰 기대가 사실은 큰 두려움이었어요. 시장 선거 당선 때 기뻤던 순간은 출구조사 후 딱 3초 정도? 나머지 시간은 엄청난 두려움으로 시작됐어요. 당시 ‘시민들의 높은 기대와 열망에 부응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컸죠. 이제 시민들 속에서 희망을 봤어요. 제가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간다면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봐요. 제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 그게 오히려 요즘은 큰 두려움이예요.” ‘완벽한 권영진을 신뢰하는 여러분들에 대한 두려움이겠네요’라고 되묻게 됐다.

인터뷰를 끝내고 보니 그 역시 평범한 시민들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특이한 행보? 갑자기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메카트니(Paul McCartney)가 생각났다. “나는 늘 별난 짓을 하는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는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를 이상하다고 말한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폴 메카트니의 말이다.

최연청기자 cyc@idaegu.co.kr

※권영진 시장은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나 1987년 전국 최초로 대학원총학생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이 됐다. 통일원 통일정책보좌관, 서울디지털대학 교수, 한나라당 정책위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역임했다. 2008년 18대 국회의원 당선 후 국회 교육과학기술위 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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