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 주고 받은 편지
교단에서 주고 받은 편지
  • 승인 2015.08.1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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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선
대구대진초등학교장
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정년을 맞아 하나, 둘 교직을 떠나는 교장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교단 40년 동안 베푼 것보다 얻은 것이 너무 많다.

살아온 흔적들을 손으로 만져본다. 82년도부터 만든 학급문집 <색동> 22권! 76년도부터 <교단에서 받은 편지>철 29권! 보내온 향기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교사로, 작가로, 강사로 살아온 모습들을 담은 앨범 철, 그리고 고령 <베나(베풀고 나눔)의 집>을 찾은 사람들의 방명록 등이 향기로 남아 있다.

이 중에서 <교단에서 받은 편지>철들은 재산 목록 제 1호이다. 만약 우리 집에 불이 난다면 제일 먼저 대피시켜야 할 보물이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이 돌아가시고 한참 지난 뒤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를 그 아들 이정우 선생이 보관하고 있다가 책으로 출간하였다. 구상 문학관에도 박정희 대통령과 시인 구상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 원본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다. 사람은 가도 편지는 남는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향기를 담고서.

내가 받은 편지들 중 서로 따스하게 주고받았던 편지 몇 장을 들추어본다.

「선생님, 진아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제 딸 진아는 어릴 때부터 경기를 많이 하여 발육도 늦고 모든 게 모자랍니다. 아이 아빠도 어릴 때부터 그랬고 저 역시 다리 불구자라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진아 일기장을 훑어보니 기대보다 너무나 나아져 희망이 반짝 보입니다. 저는 어미로서 완전히 포기하고 함께 죽자고 많이도 울었답니다. 그런데 진아 글을 학급문집에 올려주시고 방학 때는 편지도 보내주신 걸 보고 감동에 못 이겨 진아 대신 답장을 써봤지만 용기가 없어 부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아 워낙 글이 짧지요. 이제 진아는 줄넘기도 잘하고 제 짝꿍 집에도 놀러 갔다나요. 대견스러워 오늘 밤엔 꼭 안아주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주위의 이해와 인정이 한 아이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신념을 갖고 쓴 답장 흔적도 남아있다. 「진아 어머님! 진아에 대해 절망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주위에서 인정을 해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늘 희망을 갖고 진아를 잘 보살펴 주시길 빕니다. 학교의 진아 엄마 박경선 드림」

「선생님, 저 3학년 때 덕순인데요. 중학생이 되었어요. 저는 3학년 때 제 짝꿍 재훈이를 좋아해요. 언니는 ‘쪼그마한 게 하마부터’하고 놀리지만 선생님은 제 마음을 아시겠죠? 그래서 전근 간 선생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1987년 5월 27일 덕순 올림」이 편지를 받고는 재훈이랑 친할 수 있도록 재훈이에게 우편으로 동화책을 보내어 덕순이랑 꼭 함께 읽어보라고 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재훈이는 선생의 잔꾀를 눈치 채지 못하고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선생님, 보내주신 동화책 잘 읽었습니다. 덕순이와 함께 읽지는 못했지만 제가 다 읽고 덕순이에게 전해주었습니다.」멍청한 선생을 믿은 덕에 덕순이는 재훈이의 관심을 받기 위해 선생과 수차례 편지를 더 주고받으며 가슴 아린 마음들을 보듬어갔다.

「선생님이 편지에 ‘이젠 선생님을 잊고 현실에 만족해라’하셨지요? 하지만 전 선생님을 잊을 수 없어요. 지금도 수업시간이 되면 칠판 앞에 지금 저희 선생님보다 작년 담임인 선생님 얼굴이 아른거려요. 전 커서도, 아니 죽을 때까지 선생님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왜 선생님을 잊으라고 하셨지요? 1995년 3월 27일. 혜진 올림」그렇게 절절한 마음을 보내왔던 혜진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도 없다.

「저희 기억에 선생님은 또 하나의 어머니세요. 영환이가 선생님을 어머니라 여기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어머니세요. 교실에서 소외된 친구들을 위해서도 선생님은 밤의 별처럼 빛나셨어요. <우리가 살다 힘들 때면> 시집을 읽어주셨을 때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고마움입니다. 저 훌륭한 사람 못되더라도 나중에 찾아뵈면 반겨주세요. 1996년 12월 29일 제자 혜현 올림」혜현이도 지금쯤 40대쯤 되었겠다.

내년(2016년) 8월이면 정년퇴임을 맞기에 요즈음 들어 부쩍 제자들 이름을 불러본다. 허공에 대고…….

“사랑하는 제자들아,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니? 보고 싶다. 고령 <베나의 집>으로 모여봐. 호박 선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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