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제위를 버린 마우리아 황제
<대구논단> 제위를 버린 마우리아 황제
  • 승인 2009.01.19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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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식 (대구대 교수)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인도는 기원전 322년경 최초로 통일됐다.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은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라는 한 위대한 인물에 의해 건설됐다. 한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통일제국이 건설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단계로서, 한 국가의 앞으로의 영향권과 틀을 형성하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진시황의 통일이 없었다면 그 후 중국의 강력했던 영향권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지만 한 지역의 발전과정에는 국가라는 것이 없던 단계에서 국가가 형성되는 단계로 나아가게 마련이지만, 처음부터 거대한 통일제국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소국들이 형성되어 발전하다, 한 강자에 의해 거대한 통일제국이 형성되는 것이다. 인도도 마찬가지로 많은 소국들이 기원전 322년 경 마우리아에 의해 통일됐던 것이다. 이렇게 건설된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는 오늘날 인도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나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삼황오제의 국가가 있었다 하지만 전설에 가깝고, 요순의 아름다운 왕위계승 이야기로 분식되어 있는 이 시대를 이어 하왕조가 건설되었다고 하지만 아직은 미지의 국가이다.

그 다음의 은주는 사실상 여러 소국들의 연합체인데, 이것이 춘추 전국시대가 되어 난타전을 벌이다 진시황이 최종적으로 통일했던 것이다. 진시황은 여러 왕국들을 통일한 마당에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못마땅해 새로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래서 그를 첫 황제라는 의미로 `시황제’라 하지만, 나라 이름도 이때부터 황제의 나라라는 의미로 `제국’이라 하여 `왕국’과 구별해 부르는 것이다. 로마 역시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이태리 반도와 그 너머, 또 지중해 연해 지역까지 정복했다. 조그만 도시 국가 로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광대한 영역이었다.

도시국가 시절 만들어진 공화제가 실효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들었고,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꿈꾼 자가 카이사르였다. 그러나 그가 공화주의자들의 칼에 의해 쓰러지고, 클레오파트라까지 등장하는 한바탕 소동 끝에 최종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초대 황제가 되었다.

기원전 27년의 일로, 로마도 이제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시황제’이었던 셈이다.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의 제국 건설과정도 이와 유사하지만, 그의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곧 와해되어 위의 세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근래 그를 그린 한 영화는 그를 인도 서쪽까지 정복하다 말라리아로 죽은 불세출의 영웅이 아니라, 정복욕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정복을 계속하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는 인물로 묘사했다.

세계의 각종 분쟁에 자신도 모르게(?) 개입하는 미국을 염두에 둔 해석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확실치 않지만 인도 정복 시 마우리아가 알렉산더를 찾아가 만났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인도 정복의 중단을 요구한 만남이었다고 보이지만, 마우리아는 기원전 326년의 이 만남 이후 불과 4년여 만에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했다.

마우리아의 인도 통일 야망이 알렉산더와의 만남으로부터 움터 나온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서 참으로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의 통일제국 건설과정들이 아름답게 묘사된 것이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있지만, 기실 그것은 `피’의 역사였다.

영화의 해석처럼 알렉산더도 피 맛에 길들여져, 자신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망각했을 수도 있다. 진시황도 자신이 죽인 수백만 명의 생명에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들 제위를 움켜쥐고 자자손손 물려지기를 원했다.

마우리아는 곧 제위를 버리고 고행과 자비의 길에 몸을 던지다 죽었다. 왜 그랬을까? 통일과정에서 죽은 무수한 생명들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손자 아쇼카도 재위 초기의 살육을 뉘우치며 부처의 길을 따랐다. 불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한 데는 그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아름다운 산사(山寺)도 그의 엄청난 `개심(改心)’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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