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에 대한 감각
천원에 대한 감각
  • 승인 2016.01.0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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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철학본색 대표
지난 달 아이와 둘이서 서유럽을 여행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이동하던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게 되었는데, 아이가 달려와 돈을 달라고 했다. 1유로를 건넸는데, 이때 처음으로 나는 아이에게 현물이 아닌 현금을 주었다. 1유로를 건네 받은 아이는 들뜬 마음으로 사냥꾼의 눈으로 이탈리아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진열된 상품 하나하나의 가격표를 훑어보며 1유로로 무엇을 살 수 있을지 바쁘게 타진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1유로로 살 수 있는 물건은 ‘거의’ 없었다. 우리 돈으로 1천200원이 넘는 돈인데... 그 흔한 하리보 젤리도, 킨더 초콜렛도, 애플 쥬스도 1유로로는 살 수가 없었다. 아이의 기분이 상하기 전에 아이에게 2유로를 더 주고서는 긴 버스 여행을 견딜 간식거리를 고르도록 했다.

아이는 이번 유럽 여행에서 시스티나 천장화나 파리 에펠탑보다 정작 돈의 쓰임새를 발견하고 더 큰 놀라움을 경험한 것 같다. 여행 중에는 신용카드보다는 현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교적 긴 여행에서 돈의 쓰임새를 이해한 아이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자주 돈을 달라고 한다. 오늘은 숙제로 나온 계산 문제를 풀고 엄마에게 천원을 상으로 받았다. 점퍼 주머니에 고이 넣으면서 아이는 천원으로는 아무 것도 살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투덜댔다. 천원으로 아무 것도 살 수가 없다니... 나는 50원으로 해피면을 사먹었고, 150원이면 콜라를 살 수 있었다. 오락실 게임 한판은 100원이었고, 문방구 앞 쪼그려 앉아야만 할 수 있던 오락기는 50원이면 충분했다. 초등학교 하교길에 늘 들리던 분식집 간장 떡볶이 한 접시는 200원이었니 천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천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줄어 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천원 지폐 한장이 나 자신에게 갖는 양감, 크기, 가치는 그 때와 비교해 별로 바뀐 것이 없다. 그러니까 나의 천원에 대한 감각은 유년기에 생겼고, 지금까지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오히려 천만원이니 일억원이니 하는 돈은 단 한번도 현실적인 감각으로 체험해보지 못한 그저 통장에 적힌 숫자로만 경험하는 ‘관념적인 크기’의 돈일 뿐이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천원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아이의 말이 도무지 와 닿지 않는다.

천원에 대한 감각만 아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 역시 다르다. 내가 아이만할 때에 내 아버지는 자동차가 없었다. 유년기에 내 세계는 어머니와 걸어서 갈 수 있는 시장,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로 갈 수 있던 동네의 초등학교까지였다. 하지만 내 아이는 아빠와 엄마의 자동차로만 갈 수 있는 놀이공원, 걸어서 가기란 불가능한 마트까지 나와는 아주 다른 시공간 감각을 갖고 살아간다. 굳이 말하자면 아이의 시공간 감각은 자동차 의존적이다. 비행기로 파리와 로마에 다녀온 내 아이와는 달리 고백하건대 나는 비행기를 대학에 가서야 처음 탔고, 대학 입학 전까지는 서울도 가본 적이 없다.

천원으로 아무 것도 살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투덜대는 아이를 보며 ‘‘세대 차이’는 세상에 대한 경험 정도의 차이나 지식 차이에서만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르신들이 젊은 세대의 결단과 선택을 보고 ‘간이 부었다’고 나무라실 때, 혹은 구직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에게 ‘뭐든지 해볼 생각은 안하고 불평만 한다’고 하실 때, 거기에는 돈, 공간, 시간에 대한 감각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내 아버지 세대에는 2천만원이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고, 내 할아버지는 50만원으로 지금도 살고 계신 집을 마련하셨다고 한다. 돈의 크기에 대한 개개인들의 구체적인 감각은 이처럼 자신의 고유하고 개별적인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돈’의 실제적 가치가 변한다고 해서 함께 변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라고 있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인식은 자라지 않고, 돈의 가치가 변하듯 세계와 사물이 변하고 있지만 우리의 감각은 함께 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대 간 갈등이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부모가 ‘아이의 경험을 확장하는 것’을 넘어 부모인 ‘자신의 경험과 사고 더 나아가 감각까지도 끊임 없이 확장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야만 아이를 나의 좁은 세계 속에 가두지 않게 될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감각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부모의 양육 태도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처럼 기존의 우리 감각에만 호소하는 정치도, 언론도, 기업도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묵은 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할 때는 복만 빌 것이 아니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끊임 없는 감각의 갱신, 천원에 대한 내 감각의 파괴까지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바로 그 때가 변화가 시작되는 때일 것이다. 감각이 더 없이 확장되는 한 해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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