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놀이
일과 놀이
  • 승인 2016.02.2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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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자연요리연구가
입춘첩을 대문에 붙이고 겨울 품에서 속속 당도하는 봄을 영접한다. 아직 옷섶을 파고드는 바람은 차지만 매화 소식은 벌써 지천으로 널렸다. 가지 않고도 남도의 봄소식을 손바닥 안에서 실시간으로 만나다니 참 좋은 세월이다.

향기는 없지만 매화 꽃잎에 코를 묻고 숨찬 겨울을 보낸 나는 잠시 쉰다. 꽃 피면 이산 저산으로 또 분주해질 테니 꽃 만발하기 전에 즐기는 쉼이라 더 값지다. 일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됐다.

일단 멈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잠시 몸의 리듬을 회복하는 순간이다. 매사 균형이 깨어질 때 탈이나니 겨우내 일 쪽으로 한껏 기울어져 있던 몸을 흔들어 제자리에 다시 데려다 놓는 시간이다.

쉴 때는 격식도 체면도 필요 없다. 충실히 몸이 하자는 대로 마음이 한 발짝 뒤에 서서 따라가면 된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면 몸은 따로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깨어난다.

오감이 제자리를 잡고 행동과 판단력에도 근력이 붙는다. 힘은 소진되는 속도보다 채워지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니 쉼만 제대로 해도 그다음 일을 반은 해낸 것과 진배없다.

미리 귀띔해 두자면 몸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어서 몸이 고단하면 생각이 단조로워지고 편안하면 뇌가 분주해지는 상관관계가 있다. 의도하지 않아도 몸과 뇌는 서로 밀고 당기며 조화롭게 상생한다. 저 들녘에 봄꽃과 바람처럼.

끈 놓고 쉬고 있으니 눈에 들어오는 사물이 있다. 겨우내 바빠 돌보지 못 한 선반 위에 식구들이다.

볕이 고파 웃자란 다육식물이, 그 옆에 허옇게 버짐이 핀 맷돌 호박, 그리고 지난여름 백련 밭에서 주워온 마른 연밥, 올려다보니 다들 내 손길을 기다리는 눈치다. 온전한 쉼 사이에 불현듯 찾은 놀이거리다.

이차저차 털고 일어나 버짐 핀 호박을 살핀다. 겨우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더니 저도 외로웠던지 하얗게 속이 탔다. 거친 칼끝으로 호박의 배를 가르니 동굴처럼 엉킨 호박 뱃속에 푸른 떡잎 한 장. 깜깜한 그곳에서도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니 참으로 경이롭다.

기다리다 못해 호박 속에서 싹을 틔운 모양이다. 환경이나 처지는 미뤄두고라도 싹 틔울 의지만 있다면 이 깜깜한 곳에서도 싹은 트는 모양이다.

반은 백설기에 넣게 호박오가리를 만들어 두고 반은 쌀가루에 섞어 떡을 찐다. 몇 알은 장미 무늬가 들어간 고명 틀에 눌러 절편을 만들고 또 몇 알은 둥글게 경단을 빚어 고물에 굴린다. 찹찹 식구들의 입이 즐겁다. 음식도 사람도 담담하고 한가한 맛이 그중 최고다.

일하고 잘 쉬었으니 잘 놀아도 봐야 한다. 사람은 본시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의 본능을 함께 지니고 태어났다. 이미 지닌 놀이 본능을 일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일이 고역이 되는 경우는 일 자체만을 무한 반복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일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기 전에 놀이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새벽별보며 ‘잘살아 보세’를 외치던 시절은 갔다. 적당한 시기에 팽팽히 당겨진 노동의 끈을 느슨히 푸는 방법도 함께 간구해봐야 할 시기다.

일만 하며 물질에 매달리다 보니 현대인의 모습이 점점 짐승에 가까워진다.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족이 무너지고 부모가 자식을 해치는 뉴스를 보며 이 땅의 분노가 어디까진 지 몹시 염려스럽다. 일과 쉼의 균형 잡힌 리듬 속에 조화로운 삶이 숨어있는데 일 중심의 문화는 생명만 파괴할 뿐이다.

놀이보다는 일하는 모습이 미덕인 시절이 있었다. 그 모습을 너무 오래 유지하다 보니 이런 병적 사회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밥벌이에 지쳐있는 현대인은 이제 그만 쉬어야 할 때다. 쉬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흩어진 가족과 세상을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깨금발로 장롱 위에 올려둔 반짇고리를 내린다. 마른 종소리를 내는 연밥을 흔들어 연자를 빼내고 텅 빈 연밥에 조각 천을 둥글게 말아 채운다. 연두 옆에 주황 또 그 옆에 더 붉은 자주색을 채워보니 목을 길게 늘이고 봄을 학수고대하던 내 마음에도 금방 꽃이 핀다.

가끔은 밥과 상관없는 일에 순정한 몰두를 바칠 필요가 있다. 그저 좋고 즐거운 일에 마음 다하다 보면 분노의 겨울도 물러가고 봄이 오겠지. 뒤축 헐떡이며 바삐 달릴 필요 없이 꽃도 보고 해찰도 부리며 한 생(生)을 천천히 건너가는 게지. 그래야 이 땅에도 온전한 봄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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