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장담기
정월 장담기
  • 승인 2016.03.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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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자연요리연구가
며칠 바람이 세차더니 오늘 잠시 바람이 잔다. 바람 자는 김에 달력을 보니 말날이라 장을 담는다. 지난겨울 만들어 둔 메주를 꺼내 솔로 구석구석 닦아내고 옥상 빈 옹기에 담아 간수 뺀 소금을 맑은 물에 녹인다. 나무주걱으로 소금물을 저으니 처음에는 뿌옇게 일어났다가 점점 맑아진다. 윗물이 맑아진걸 보니 얼추 소금이 녹은 모양이다.

동전만큼 떠오르는지 계란 띄우고 함지박을 들여다보는데 찰랑대는 함지 안에 봄볕이 가득하다. 주걱으로 가득한 햇살을 쪼개고 흔들어 다시 물이 잠잠해질 때 까지 기다리는 동안 내 등에도 아낌없이 쏟아지는 무량한 봄볕.

옛날 송나라의 가난한 농부가 봄볕을 등에 쬐면서 “세상에 이보다 더 따스한 것은 없으리라”는 생각에 임금에게까지 알렸다고 한다. “부훤(負暄))”이라는 단어에 숨어 있는 이야기다. 등 따시고 배부르다는 말처럼 봄볕 한 줌으로 등 데우는 일은 그 어떤 부귀영화 못지않다. 등을 햇볕에 내어주고 소금 녹을 동안 비슬산을 올려다보니 그새 볕이 고팠던 겨울은 가고 등 따신 봄이 와 있다.

아직 나무는 기척 없어 보이지만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산등성이는 미묘하게 색이 달라졌다. 바람 청량하고 다뿍한 햇살이 이미 한껏 물을 품었다.

비타민 함량이 높아 보이는 봄볕은 언제나 한정판이기 때문에 게으름 피울 새가 없다. 언제 꼬리를 감추고 달아날지 모르니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흔전만전 쏟아지는 봄볕을 다 받아 내려면 오늘 하루해도 몹시 짧겠다.

두고 보자면 나는 햇볕 노동자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해가 나면 일하고 비 오면 쉰다.

내가 만지는 음식이 거의 마른 음식이다 보니 햇살 좋은 날은 분주히 움직이고 흐린 날은 쉴 수밖에 없다.

자연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의탁해 일하다 보니 철저히 날씨 따라 움직이게 되고 따로 조율하지 않아도 일과 쉼이 번갈아 다가온다.

주로 말리고 삭히는 전통음식은 햇볕이 필수다. 저장과 살균 때로는 발효의 촉매제로 쓰이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몸 안의 기운을 팽팽하게 끌어올려 주기도 한다. 볕도 밥과 같아서 흠뻑 쬐고 나면 탐스럽게 기운이 오른다. 누군가 해주는 밥상을 배불리 먹었을 때처럼.

몸에 슬슬 힘이 오르니 묵은 장독대를 행주로 닦아낸다. 잠시 뚜껑을 열고 면포만 덮은 채로 볕도 보여주고 탁기도 몰아낸다. 맑은 봄볕을 받은 장독은 아랫목같이 따끈하다.

청소한 행주는 수돗가에서 방망이로 탕탕 두드려 먼지를 씻어낸다. 방망이질은 언제 해도 찰나의 희열이다. 물에 흔들어 씻는 것은 분명 행주인데 내 마음이 더 개운해지는 이유는 뭘까.

겨울 체증이 물 방망이 세례에 시원스레 날아간다. 내 진즉에 빨랫방망이를 선호했지만, 이토록 좋은 줄 미처 몰랐다.

새로운 장을 담기 전에 묵은장을 정리한다. 빈 항아리는 씻고 볕에 졸여진 장은 햇콩을 물기 자작하게 삶아 넣고 콩물은 식혀 붓는다.

팍팍해진 장이 부드럽게 섞일 때까지 오래 치댄 후에 마지막으로 누룩을 섞어 준다. 누룩이 없으면 막걸리를 섞어도 된다. 이미 발효의 과정을 거친 장이지만 누룩으로 한 번 더 발효 시켜 줌으로써 묵은장도 햇장처럼 다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누룩 소금이나 누룩 장이 인기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에 무슨 누룩을 싶겠지만, 재차 누룩으로 발효시킨 장에는 감칠맛 나는 향기와 혀끝을 감도는 미감이 새롭다.

이렇게 누룩 장과 정분이 나버리면 기존 장맛을 잊게 된다. 누룩이 술 담을 때만 필요하다는 생각을 완전히 깨는 맛이다. 이미 일본에서는 음식의 감칠맛을 낼 때 누룩 장이나 소금을 활용하고 있다.

묵은장을 비운 항아리를 짚불로 소독하고 잡스러운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수증기로 한 번 더 갈무리한 다음 씻은 메주를 담는다.

녹인 소금물을 체에 걸러 단지에 붓고 대추 세 알, 고추, 구기자 한 줌, 마지막에 달군 숯을 넣어 남았을 삿된 기운을 깨끗이 정리한다. 솔잎 끼운 새끼줄로 단지 주둥이에 금줄을 치고 면포를 덮어 올해의 장을 완성한다.

애당초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고 이제 비와 바람 따끈한 볕이 다녀가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살아 있으므로 누리는 등 따신 봄날의 짧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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