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가 국경을 넘어 사랑했다는 내용의 서동요는 TV 드라마로 각색될 정도로 인기있는 사랑 이야기다.
삼국유사 제2권에 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밤이 되면 남몰래 서동 방을 드나든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학계를 중심으로 삼국 통일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백제의 왕과 신라의 왕이 사돈관계를 맺는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됐던 게 사실이다.
일단 고려후기 고승 일연(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삼국 통일 후 수백 년 뒤에 쓰여졌고, 통일을 이뤄낸 신라의 역사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 정사라기 보다는 고려시대 때 스님이 지은 야사인 설화풍인데다가 격전 중인 신라와 백제 사이에 결혼이 성립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혹이 이런 의심의 골자를 이루고 있었다.
이 같은 학계의 의심은 19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 미륵사지 석탑내 ‘금제사리봉안기’로 인해 한층 더 증폭될 전망이다.
조사 결과,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백제 말기 시대 상황에서 볼 때 적국인 신라의 공주가 무왕의 왕비가 될 수 있었을지에 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문서에 대한 판독 결과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의 딸인 것으로 나타난 점에 비춰 설화 자체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백제 성왕(554년)이 신라군에 붙잡혀 살해당한 후 더욱 격하게 전개되는 백제-신라간 전투 상황에서 과연 양국간의 결혼이 가능하겠냐”는 말도 곁들였다.
물론 ‘금제사리봉안기’에 적시된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는 견해도 있어 그 정확한 해석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기에 서동요의 내용이 실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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